보석이가 태어난 지 146일 되는 날이다. 출산 전날 그러니까 147일 전 혼자 왔던 카페에 다시 혼자 왔다. 지금은 오후 1시. 이 시간에 무언가를 쓸 수 있다니! 내게2시간의 자유가 주어졌다. 카페에서 1시간, 등 마사지를 받고 오는데 1시간을 소요할 예정이다. 카페에서 1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급하다. 노트에 휘갈기는 펜 놀림이 춤사위 같다. 나는 147일 전에 그랬던 것처럼 카페인이 없는 음료와 케이크 한 조각을 시켰다.
남편의 휴일, 아기를 맡기고 나왔다. 말이 쉽지, 남편에게든 누구에게든 아기를 맡기고 홀로 마실 가는 건 엄마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혼자 아기 보기를 두려워하는 남편을 설득하여 2시간을 만들어내기까지 무려 146일이 걸렸다. 몇 번 나 혼자 외출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신생아인 보석이를 재우고 잠깐 나갔다 온 것이라, 남편은 잠에서 깬 아이를 안고만 있으면 됐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남편에게 외출을 하겠노라고 선포했다. 남편은 설마 하는 눈치였지만 낮 12시 수유를 마치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었다. 보석이를 데리고 놀다가 칭얼거리면 재워서 3시까지 버텨보도록 미션을 주었다. 남편은 알겠다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다음 달에는 내가 장시간 외출을 해야 할 일이 몇 번 있다. 그 때를 위해 남편도 혼자 보석이를 케어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오늘 특별히 중요한 볼 일이 있지는 않았다. 마사지를 꼭 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내가 꼭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심성이 착한 남편은 그렇다면 당연히 나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석이와 둘만의 시간이 정말 두려운 눈치였다. 나는 모른 척했다.
가방에 노트와 책 한 권을 넣고 힘찬 걸음으로 집을 나섰으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보석이 울음소리가 멈추질 않자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남편이 아기를 방치할 사람도 아니고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고 이성이 말해주었지만 내 손은 저절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혼자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기에게 달려가 안으려고 하니 마침 남편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다. 아기띠를 하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온 것이리라. 나는 머쓱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서둘러 집을 나왔다.
남편은 엄마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이제 엄마가 되는 걸 배우는 중인데, 아기를 낳자마자 엄마가 다 된 줄로 안다. 정작 갓 태어난 보석이는 내가 엄마인 줄도 모르는 것 같을 때도 남편은 “역시 엄마 품에 가니까 울음을 그치네.”, “엄마가 재워줘야 자네.”하며 감탄을 했다. 나는 어쩐지 어색했다. 보석이는 내 품에서도 악을 쓰고 울며 2시간 동안 잠을 안 자는 때도 많았다. 다만 ‘엄마’는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이 불가능한 역할이다. 몇 시간 동안 우는 아기를 안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제발 누가 나 좀 구해줬으면'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반면 아빠는 아기를 좀 얼러보다 안 되면 엄마에게 넘기면 된다. 모성과 부성의 타고난 차이도 있지만 마음가짐의 차이도 분명 있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엄마가 최고라고, 조금 크면 아빠가 잘 놀아준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뒤로 빠지다 보면 아기를 돌보는 데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중엔 남편이 나와 보석이로부터 소외될 것 같았다.
오늘 2시간 여의 시간 동안 남편과 보석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조금이라도 미운 정 고운 정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고함을 지르며 뻗대는 몸을 꼭 붙잡고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는 새근새근 잠에 든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똥 기저귀를 갈고 엉덩이를 씻겨야 할 수도 있다. 남편의 웃옷에도 침과 토가 얼룩져 두 번쯤 갈아입게 될 것이다. 그렇게 씨름하고 났는데 갑자기 날보고 방긋 웃어주는 아기 웃음에 애틋한 감동을 겪어보길 바랐다.
뭐,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2시간의 카페 놀음과 마사지는 천국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등과 어깨가 쭉 풀어져 날아갈 것 같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더니 남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고개만 절레절레할 뿐 자세히 말도 못 한다. 보석이도 지쳤는지 수유를 하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나는 잠든 보석이를 눕히고 재워둔 소고기를 구워 남편을 먹였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야 남편은 정신줄을 다잡은 듯했다. 보석이는 남편이 안아주는 게 불편했는지 내가 나간 직후부터 계속 울었다고 한다. 아기띠를 해서 간신히 20분 정도 재웠으나 내려놓으니 또 깨어 악을 쓰고 울었단다. 남편은 처음에 화가 났고 나중에는 자신에게 아빠 자격이 없는지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씨름하다 지쳐 나에게 빨리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힘없이 까꿍, 했더니 보석이가 꺄르륵 웃더란다. 여기까지는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와 비슷했다. 생각보다 둘 다 고생해서 마음이 아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앞으로 또 마사지를 보내 줄 엄두가 안 난다고 덧붙인다. 내가 정말 위대하게 보인다며, 앞으로 집안일과 같은 보조적인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느꼈단다. 혼자 보석이를 보는 건 300일쯤 되면 다시 시도해보겠다나. 이쯤 되면 사실 남편이 내 머리 위에 있는 건지 헷갈린다.
어쨌든 이후 내가 보석이를 목욕시키고 재우는 동안 남편은 평소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며 보조 역할을 했다. 목욕이 끝나자마자 욕실을 정리하고, 보석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설거지를 하고, 건조기 필터 청소도 다 해놓았다. 오늘의 감상이 어느 정도 진심이었나 보다.
보석이는 평소 9시 전에 잠드는데 오늘따라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겨먹으려고 용을 쓰며 자지 않는다. 실은 9시 30분에 치킨 배달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9시가 지나면서부터는 엄마 마음이 치킨에 가 있는 걸 간파한 것 같다. 9시 40분이 되어 간신히 잠들었지만 이후 30분 간격으로 으앙 울음을 터트려 다시 안아주어야 했다. 새벽에는 안 하던 밤수까지 하고 말이다. 아빠와 씨름했던 2시간이 그렇게 괴로웠던 건지, 마침 이앓이로 힘든 날에 아빠와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마사지로 싹 풀렸던 내 몸은 반나절 만에 다시 꽉 뭉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