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사색_ 14
“아줌마!”
길에는 나 밖에 없었으니 나를 부른 게 분명하다. 용건을 알기도 전에 적대적인 자세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운 은행이 어디 있어요?”
모르겠다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났다. ‘아줌마’라는 불특정 한 호칭이 나를 부르기 위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라고 마음속으로 쏘아붙이면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부탁이나 질문을 하려면 “저기요” 또는 “실례합니다.” 등의 예의를 갖춰 불러야 하지 않느냐고 되뇌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줌마라는 호칭 자체가 듣기 싫어서 분한 게 맞다. 만약 정중하게 “아주머니~”라고 불렀다면 기분이 더 나빴을 테니 말이다. 나는 스스로가 아직 ‘젊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아줌마’는 젊은 여자의 반대어로 들렸다.
나는 삽십 대의 결혼한 여자다. ‘아줌마’의 사전적 정의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고, ‘아주머니’의 뜻에는 ‘남남끼리에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 있으니 사실 그 행인이 내게 ‘아줌마’라 부른 게 그리 큰 실수는 아니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 아기를 낳고 엄마가 되었으니 ‘아줌마’라는 호칭이 더욱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아줌마라 부르는 사람은 대개 누군가의 엄마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도 ‘엄마’의 대표 이미지는 뽀글뽀글 파마머리와 펑퍼짐한 몸매를 한 아줌마다. 하긴, 나도 나의 엄마가 아줌마라고 불린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반발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고작 삼십 대에 뽀글뽀글 파마머리와 펑퍼짐한 몸매의 대명사인 아줌마로 불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 아기 엄마들은 대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중반이고 사회생활을 한다면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무신경한 '아줌마!' 소리는 가당치 않다. 그렇다. 나는 지금 행인에게 아줌마로 불린 것에 분해하며, 내가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으면 그렇게 아줌마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고 항변하는 중이다. 아마 임신과 출산을 거쳐 둥그러진 몸매와 육아와 집안일에 바빠 우악스러워지는 행동을 자각하고 진짜 아줌마가 되어가는 게 두려운 걸 거다.
한 손으로 보채는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갓난아기인 나를 안고 있던 서른 살 무렵의 엄마 사진을 떠올린다. 서른 살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앳되고 수줍었다. 나는 엄마의 삼십 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함께했지만 엄마의 젊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인지능력을 획득한 이후로도 엄마의 젊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엄마의 얼굴은 늘 내 나이보다 30년 더 많은 풍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라는 이름은 늘 나이 들고 수수한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낳을 당시 아줌마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은 ‘젊은 여자’였다. 이십 대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힘과 열정이 있고 사회 활동성은 고점에 이른, 어찌 보면 인생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강하고 아름다운 삼십 대 여성이었다. 나는 엄마 인생의 변화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의 삶은 젊음에서 시작했다.
나도 나의 엄마처럼 젊은 엄마로 시작하여 아이가 먹는 나이만큼 풍화를 겪어갈 것이다. 지금은 걸음마도 못하는 내 아기를 위해 슈퍼우먼처럼 어떠한 일도 해내는데, 후에 이 아이가 엄마의 강함과 젊음은 기억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보다 30년 늙은 모습만 기억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서글퍼진다.
외출할 일이 있어 오랜만에 곱게 화장하고 출산 후 회복이 덜 되어 늘어진 뱃살을 가려줄 적당한 옷을 찾아 입었더니 그래도 아직은 젊고 예쁜 구석이 거울에 비친다. 바닥에 엎드려 고개만 든 채 이 옷 저 옷 입어보느라 분주한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아기 앞에 서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본다. 엄마도, 매력을 가진 한 여자인 시절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