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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ul 20. 2019

남편의 자리

육아와 사색_ 16

밤늦게 퇴근한 남편이 발바닥을 문지르며 말했다.


“여보, 나 족저근막염이 생긴 것 같아.”


생명이 위태로운 질환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일만큼 성가시다는 그 족저근막염! 남편은 원래 건강 체질인 데다가 생활 습관도 모범적이라 아픈 데가 잘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족저근막염’이라는 자가 진단을 내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침통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 집의 기둥, 가장의 발에 근막염이 생겼다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남편의 침통한 표정이 귀여웠다. 내 발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반성하면서 열심히 족저근막염의 해결책을 검색해 본 후, 내일 당장 기능성 신발을 사러 가자고 큰소리쳤다. 남편은 내 적극적인 태도에 감동한 눈치였다.



요즘 남편이 미는 유행어는 “나도 좀 케어해 줘.”다. 산후조리원에서 신생아와 한창 씨름할 무렵 남편의 머리는 덥수룩하니 커트할 시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남편은 항상 나와 함께 미용실에 갔기 때문에 혼자 미용실 가는 게 익숙하지 않다. 갓 태어난 아기에 온 몸과 마음을 빼앗겨 있던 나는 남편의 머리가 덥수룩 길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자려다 말고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여직원들이 케어 못 받는다고 놀려.”  


서로만 의지하고 살던 부부에게 아기가 생기면 아내의 애정 축이 급속히 아기에게 쏠리면서 남편도 일종의 산후 우울증까지 겪을 수 있다. 게다가 태어난 아기가 아들이라면 더욱 아내를 빼앗긴 기분이 든단다. 이론은 알지만 육아로 지쳐 있을 때는 나도 좀 케어해달라는 남편의 말에 타박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나와 당신을 한 편에 두고 함께 아기를 케어해야지, 다 큰 남자가 아기와 한 편에 서서 내 케어를 바라고 있나? 그럼 나는 누가 케어해주지?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고 있는데 뒤늦게 잠에서 깬 남편이 거실로 나왔다. “에어컨 바람 차지 않아?”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당신이 앉은 자리가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쪽이라 그래." 잠시 후 남편은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오더니 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들아, 춥지 않니?” 나도 모르게 버럭 신경질을 냈다. “아니, 왜 에어컨 바람 바로 나오는 데만 찾아가서 춥다 춥다 하는 거야? 애 껴안고 씨름해 봐, 땀 나.” 당황한 남편은 애교 섞인 말투로 “알겠어.”라며 내 어깨를 잠시 끌어안았지만 머쓱한지 다시 부엌으로 가버렸다.


꼭 분위기가 이상해지고서야 내가 지나친 반응을 보였음을 깨닫는다. 아차 싶어 아기에서 눈을 돌려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 바닥 전체에 아이가 노는 매트가 깔려있고 장난감과 아기 의자 등이 널려있다. 어른이 앉을 곳이라곤 소파뿐인데, 소파 한쪽은 수유와 기저귀 갈이를 위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남편의 자리는 암묵적으로 반대쪽 소파 끄트머리, 바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 내리는 자리로 정해져 있었다. 날로 확장되는 아기와 나의 영역 때문에 남편의 자리는 에어컨 바람을 피하지도 못하는 소파 한 구석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자리에조차 맘 편히 앉지 못하고 식탁 의자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출근을 했다.    


Photo by Anete Lusina from Pexels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익숙하지 않은 엄마의 일에 몰두하다 보면 애꿎은 남편에게 짜증을 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내게 여러 말하지 않는다. 쓸쓸한 등을 보이며 출근하러 돌아설 뿐이다. 탁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도 남편의 슬픈 뒤통수가 남아있는 것 같아 자꾸만 현관 쪽을 쳐다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안아 달라 응애응애 울고,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분명 행복한데 생활에 치이다 보면 자꾸 발을 헛디뎌 진흙탕에 코를 박는다. 하지만 생활에 치인다고 해서 유일한 아군이자 동료인 남편에게 화풀이해봤자 죄책감과 외로움만 더할 뿐이다.



  

남편의 성실하고 불평할 줄 모르던 발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그의 발은 퇴근하고도 마음 편히 디딜 자리를 찾지 못해 서성였나 보다. 족저근막염을 호소하는 남편의 목마른 마음이 안쓰럽다. 가족만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지만 집에서 자신의 영역이 점점 좁아짐을 느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잠자리에 누워 남편의 족저근막염을 위로하고 해결해줄 유일한 사람은 나라고 되뇌었다. 날이 밝으면 우리 공동의 적, 족저근막염을 쫓아내러 세 식구가 함께 출동하리라.


Photo by Simon Matzinger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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