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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ul 26. 2019

면접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다니

육아와 사색_ 17  그래, 나는 여전히 나다

 면접을 보았다. 5개월 차 육아 생활 중 갑작스럽게 면접이라니. 복직은 가능한 늦게 하기로 마음먹고 육아에 전념하고 있지만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는 동료들에 비해 도태되는 느낌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이의 생애 첫 해를 직접 돌보고 싶은 욕심도 놓지 못해, 타개책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2년짜리 교육 과정을 수료하기로 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남편이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공부를 하고 온다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기분전환이 될 것 같다.


 이 교육 과정은 불성실한 지원자를 거르기 위해 면접을 보는 절차를 거친다. 면접날이 다가오자 마음이 부산했지만 실상 면접 준비는 아기를 맡길 준비라고 불러야 옳았다. 이렇게 긴 시간 아이를 맡기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편이 든든히 배를 채우도록 아침밥을 차려주고, 아기를 어떻게 먹이고 재울 것인지 알려주느라 출발하기 직전까지 정신이 없었다. 차 시동을 걸고서야 눈 화장을 하다 말고 집을 나섰다는 걸 깨달았다.      


 긴 머리를 푼 채 또각거리는 구둣발로 걷는 게 얼마만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면접장소인 대학교에 도착하여 주차를 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내렸는데, 카메라맨을 비롯한 촬영 스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알고 보니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의학드라마 촬영장 한복판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마치 드라마 속 등장인물 중 하나라도 되는 듯이 허리를 곧게 펴고 또각또각 촬영 현장을 빠져나왔다.      


 비중이 큰 면접이 아니라서 그다지 긴장하고 들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면접을 마치고 방을 나올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이 살짝 나는 상태였다. 육아를 하며 완전히 잊고 있던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고도의 집중을 기울이는 두 사람의 면접관에게 마음껏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이야기하니 즐겁고 흥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면접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육아만 하고 살다 보니 별 게 다 행복하다. 누군가 ‘아기는 사랑이고 휴식은 행복’이라 했다더니 그 말 참 옳다.)     




 돌아오는 길, 동부간선도로에서 청담대교로 진입하는 램프가 둥글게 커브를 돈다. 여기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매일 퇴근하던 길이었다. 진입램프는 한강 위에 떠 있지만 운전 시야에서 강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달리게 된다. 오늘따라 하늘이 끝내주게 맑고 파랗다.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타니 시속 120으로 달리겠다고 남편에게 허세를 부리고 왔지만 실제 자동차 속력은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의 속력이 시속 120, 130, 150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핸들에는 차의 속도감이 팽팽하게 실려 있다. 미세한 터치로도 차의 방향이 바뀌는 운전대의 예민한 감촉이 반갑다. 


 지금 이 통쾌한 기분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인생의 핸들을 누구도 –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기라고 해도 – 아닌 내가 쥐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아기의 먹고 자는 문제만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찾을 수 없던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원경을 취해보니, 남편에게 나는 언제 내 시간을 갖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던 며칠 전의 북받친 감정은 작은 점이 되어버린다. 내가 24시간 육아를 하며 지낸다고 해서 – 심지어 내가 선택한 일이다 – 삼십 년 넘게 만들어온 나 자신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오늘의 면접은 나에게 그런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 나는 여전히 나다.           


 집에 돌아와서 신속히 정장을 벗어던지고 풀었던 머리를 질끈 묶고 시어머니에게서 아기를 받아 들었다. 불과 반나절의 외출 후 돌아온 일상에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어머니가 무슨 공부를 시작하는 거냐고 묻더니 당신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아기를 봐줄 테니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하신다. 애엄마가 밖으로 돈다고 흉보시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부끄럽다.


 내 인생이라는 자동차는 작은 골목길을 달릴 때도 있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있다. 이런저런 환경의 제약이 있다 해도 그 상황을 어떻게 핸들링하고 어떤 새로운 상황으로 진입하느냐는 운전자인 내 선택에 달려있다. 청담대교 진입 램프의 뻥 뚫린 하늘을 마음에 담고, 아기를 뒤에 태운 오늘은 골목골목 안전하게 주행하려고 한다. 


Photo by Taras Makarenko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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