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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Aug 03. 2019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육아와 사색_ 18  여자의 몸에서 엄마의 몸으로

 임신 10개월 동안 나의 신체는 서서히 엄마의 몸으로 변했다. 


 호르몬 덕분에 전에 가져보지 못한 큰 가슴을 가지게 되었지만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종류의 큰 가슴은 아닌 듯하다. 어쩐지 ‘가슴’보다 ‘유방’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당구공 크기만큼 커진 갈색 유륜이 ‘이제 아기를 먹일 준비가 됐어요.’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아기가 태어나고 수유를 시작하니 가슴이 더 커졌다. 젖을 보관하고 분출하는 기능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할수록 가슴 조직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땅으로 내려앉았다. 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던 배는 아이를 낳고도 완전히 꺼지지 않아, 허리를 뻣뻣이 펴지 않고 앉기라도 하면 가슴이 뱃가죽에 닿는 게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거울에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육신을 발견하는 참담함이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 : 여성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만든 조각상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출처는 찾지 못했다.


 가슴이 처지는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양쪽 가슴 크기가 현저히 달라졌다. 웃옷을 벗고 자세히 보니 왼쪽 가슴을 먹여 살리는 혈관은 풍성히 발달한 반면 오른쪽 가슴의 혈관 발달은 미미하다. 이런 경우 작은 쪽 가슴에 젖을 더 많이 물리면 양쪽이 맞춰진다고 하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굶주린 아기에게 빈약한 오른쪽 가슴의 젖꼭지를 들이밀면 조금 빨아보고 실망한 듯 앵 울며 젖꼭지를 놓기 마련이다. 안정적인 수유가 가능한 왼쪽 가슴이 아기를 거의 먹여 살렸고, 아기는 내 왼쪽 상체에 머리를 누인 채 배를 불리는 데 익숙해졌다. 달이 지날수록 짝가슴이 심해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나의 가슴 모양이 어찌 되든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아기를 잘 먹이는 데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한편으로는 모유수유가 끝나면 원래 가슴으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변한 내 몸을 진짜 내 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출산이라는 특수 상황일 뿐, 차후에는 본래의 외모, 본래의 여성성, 본래의 삶을 되찾지 않겠냐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아기가 내 젖꼭지를 줄기차게 빨 텐데, 어찌 내 가슴이 그런 일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올라붙을 수 있겠는가? 


 가슴은 더 이상 성감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조차, 아니 남편에게는 더더욱 벗은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부부생활이 전처럼 즐겁지 않은 건 호르몬 변화와 육아에 지친 마음 탓이 크겠지만, 달라진 몸에 대한 자각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섹시한 몸을 보면 흥분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모습이 섹시하게 느껴질 때 흥분하는 게 아닐까. 남편의 다정한 애무도 바닥으로 떨어진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완전히 잊게 해 주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내색은 안 하지만 은밀히 고민하는 것이다. 나의 신체가 영영 여자에서 엄마로 기능이 변해버린 건 아닐까.




 출산을 앞둔 만삭의 후배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후배의 아내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들 부부와 우리 부부는 종종 만나서 식사를 해왔다. 출산을 하면 한동안 보기 힘들 테니 그전에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만삭의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몸이 많이 부었어요..."라고 말했고 그녀의 남편인 내 후배는 "임신하니 당연히 살이 찌는 건데,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나 역시 그녀처럼 내 만삭의 몸이 다른 이에게 어떻게 비칠지 내내 의식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못나 보일까 하는 그녀의 염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내 눈에는 그녀가 진심으로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배가 많이 나오고 얼굴 선이 둥글어진 건 사실이다. 피부도 더 거칠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임신 전보다 전혀 못나 보이지 않았다. 생명을 잉태한 그녀를 둘러싼 어떤 따스한 분위기 같은 것이 그녀를 단아하고 우아한 여성으로 느껴지게 만들고 있었다. 이는 배만 볼록 나오고 팔다리는 여전히 가느다란, 매스컴에서 떠드는 D라인 어쩌고 와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우아미, 숭고미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나의 만삭의 몸도,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여성의 몸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실은 평소와 현저히 달라진 만삭의 몸을 내려다보는 일이 낯설고 두려워서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내 몸에 가장 야박한 평가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몸이 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이 글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엄마로서의 세월이 더 흘렀을 때 놀랍게도 본래 모습을 되찾을지, 지금보다도 더 달라진 몸에 적응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다. 내 몸이 영영 여자의 몸에서 엄마의 몸으로 바뀌는 것인지, 엄마의 몸을 포함한 여자의 몸이 되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평생 나를 유일한 여자로 여기고 살겠다고 언약한 남편과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변모할지도 섣불리 단정 짓거나 예측하지 못하겠다. 


 지금까지는 잃어버린 부분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가졌던 편견 - 체형은 마른 축에 속해야 좋고 양쪽 가슴은 당연히 균일해야 한다는 생각, 엄마의 몸을 갖는다는 건 여성성이 감쇄되는 일이라는 생각, (사회가 말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외모를 유지해야 부부 사이의 애정이 수월히 유지될 거라는 생각 - 을 뛰어넘는 다음 차원의 아름다움과 애정이 존재할 거라 기대해본다. 지금의 두려움과 기대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여자로서 엄마로서 좀 더 살아보고, 이 글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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