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사색_40 책으로 먼저 만나는 세상
보석이를 어린이집을 데려다주는 길에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차창을 두드리며 후드득 떨어지는 비를 가리키고 이게 바로 '비'라고 알려주었다. 보석이가 비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아직 비를 비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다. 비 내린 직후 보석이와 길을 걸을 때, 비 고인 웅덩이를 보고 "물!"하고 외치는 걸 보면 아직 헷갈려하는 것 같다.
비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비'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게 참 쉽지 않다. 방울방울진 물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한 번에 내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쉼 없이 떨어진다. 차창 같은 유리에 부딪치면 길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바닥에 고이면 웅덩이가 된다. 비의 출발지점이었을 어둑어둑한 구름이 자기 몸을 다 짜내고 나면 말간 하늘이 드러난다. 태양은 늘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떠 있다.
보석이는 세상의 많은 사물과 현상들을 다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책으로 간접 경험하는 게 훨씬 더 많다. 많은 언어에 노출되고 다양한 지적 자극을 받아야 하기에 책을 많이 읽어주려 노력하는데, 때로는 아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할 개념을 당연한 듯 전해야 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보석이로서는 먹는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스크림'이, 그림책에서 항상 달콤하고 맛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등장한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말할 때 난감하다.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은 가능한 늦게, 최소 두 돌은 지나고 먹이고 싶은데 책을 읽다 보면 이건 먹는 것이고, 달콤하고 맛있는 것이고, 친구의 것을 떨어뜨리면 미안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내 염려와 무관하게 아이는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세상을 습득한다. 이미 아이스크림을 '맛있는 것'으로, 만나보지도 않은 사자나 호랑이를 사납고 무서운 동물로 천연덕스럽게 가정하고 있다.
보석이는 꽤 일찍부터 책을 읽어주면 가만히 들었고, 좋아하는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어떤 이유로 책 읽기를 즐겨하는지는 감이 안 왔다. 아주 재미난 그림책이라도, 아이가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아주 어릴 때는 엄마 품에 안겨서 리듬감 있는 목소리를 듣는 것을, 아니면 그저 엄마와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조금 더 커서는 그림에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나 자세를 따라 하거나, 토끼가 나오면 토끼 인형을, 가위가 나오면 장난감 가위를 가져오는 등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떤 장면에 흥미로운 활동이 각인되면 그 페이지를 만나기 위해 책을 읽기도 했다. 긴 줄거리 끝에 케이크가 나오는 장면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생일 파티하는 모양새로 박수를 치고, 나비가 나오는 책을 가져와서 "나비야 나비야" 노래를 부르라고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자꾸 읽어달라 하는 <곰곰이의 모험>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곰곰이와 동물 친구들이 뒷산 동굴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뒷산 동굴에 도착했더니 그 앞에 반짝거리는 보물들이 떨어져 있다. 곰곰이와 친구들이 정신없이 보물을 가방에 담고 있는데 갑자기 '우르르 우르르' 소리가 난다. 눈이 휘둥그레진 곰곰이와 친구들은 점점 더 커지는 '우르르 우르르' 소리를 듣고 비명을 지른다. "괴물인가 봐!", "엄마야!" 걸음아 날 살려라(너무 상투적인 표현이라 읽을 때마다 낯간지럽다) 도망치고 나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천둥번개가 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곰곰이와 친구들의 대단한 모험은 그렇게 끝난다.
두어 번 그 책을 읽고 난 후부터 보석이가 곰곰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듯 숨죽이고 이야기를 듣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우르르 우르르' 소리를 낼 때 갑자기 내게로 달려들어 무릎 위에 앉고 찰싹 달라붙는다. 그리고 짐짓 무서운 듯 "엄마야"하면서 팔을 흔들어댄다. 나의 빈약한 모사로 소리를 낸 '우르르 우르르'가 그리 무섭게 들렸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둥글둥글한 곰곰이 그림체도 그리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지 못한다. 보석이는 보물이 숨겨져 있지만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뒷산 동굴 앞에 선 모험가의 긴장과 공포를 머릿속에서 실감 나게 연출하는 중이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활자나 단순한 그림으로 주어진 몇 가지 정보를 가지고 머릿속에 자기만의 이미지를 재생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보석이가 어느 정도 그러한 독서의 즐거움을 깨달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혼자 기뻐하고 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반주로 삼고 <곰곰이의 모험>을 구연한다.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보석이를 흘끗 보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창밖의 비를 구경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이게 비라는 것인가...'라는 깨달음을 곱씹고 있을 거라고 한 번 더 멋대로 추측해본다. 어서 말문이 트여서 저 작고 단단한 머리통 속에 담긴 생각들을 내게 알려주면 좋겠다. 방울방울 어마어마하게 내리는 빗방울 같은 질문 공세를 받게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