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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ul 14. 2020

빠이빠이를 날려라

육아와 사색_ 39  불안한 엄마의 어린이집 적응기

 보석이는 빠이빠이를 참 잘한다. 어느 날은 꼭 사야 할 물건이 있어 혼자 보석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가 보석이가 너무 보채서 달랠 요량으로 바깥으로 나가 보석이를 벤치에 앉혀 보았다. 늦은 오후, 역전 횡단보도 앞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학생 무리가 우르르 지나가다 맨발로 벤치에 앉아 자신들을 오도카니 쳐다보고 있는 두 살배기 아기를 흘끔거렸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보석이는 특유의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손을 흔드는 빠이빠이를 날렸다. 여대생들은 "꺄아 귀여워~"라며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보석이는 이런 반응이 좋았는지, 이후로 한참 동안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빠이빠이를 날리고 찬탄과 환호를 받았다.


 보석이는 본래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아기였다. 낯선 사람에게 관심은 많지만 빤히 쳐다보는 데 그칠 뿐 그들이 말을 걸어도, 웃거나 옹알이도 없이 멀뚱한 표정만 지었다. 아기보기가 쉽지 않은 저출산 시대라 그런지 아기를 보면 예쁘다고 말을 걸어준 많은 사람들이 보석이의 뚱한 표정에 머쓱해하며 가던 길을 재촉할 때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신의 빠이빠이가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보석이에게 눈길을 보내면서도 으레 아기들이 낯가림을 하겠거니 큰 기대 않고 지나려 할 때 보석이가 아기 특유의 손목 스냅으로 빠이빠이를 날리면 놀라고 기뻐하며 "어머, 고마워!"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갈 길을 마저 가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보석이와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빠이빠이 한 번으로는 과분한 칭찬도 종종 들었다. 인사 잘한다, 너무 잘 생겼다, 어디 가서 사랑받겠다, 앞으로 이렇게 사회생활하면 된다 등등. 문화 강좌에서 적극적인 빠이빠이 덕분에 그림책을 선물 받기도 했다. 보석이의 빠이빠이는 순수한 인사라기보다 매력 발산이고 실패 없는 공격이다. 


Photo by Victoria Borodinova from Pexels


 하지만 엄마에게 빠이빠이를 할 때는 아무래도 다른 의미일 것이다. 얼마 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보석이는 내가 저를 두고 가려고 하면 엉엉 울면서도 열심히 빠이빠이를 했다. 빠이빠이에 '잘가, 당신을 보내줄게요.'라는 뜻이 있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누군가와의 만남이 끝날 무렵에 하는 어떤 행위라고 알고 있지만, 그 누군가가 엄마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상황에 떨어졌으니 몸에 익은 대로 빠이빠이를 하지만 마음은 엄마와의 이별을 인정하지는 못하는 상태 같았다. 나는 그 눈물 젖은 빠이빠이가 눈에 밟혀 한두 시간의 자유시간에도 마음을 온전히 쉬게 하지 못했다.  


 한창 분리불안을 거쳐가는 시기인 16개월에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해서인지 보석이는 3주가 지날 때까지 울면서 엄마와 빠이빠이를 했다. 엄마가 가든 말든 뒤도 안 돌아보고 친구들이 있는 어린이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아이도 있다고 들었다. 차라리 그래 주면 약간 서운할지언정 돌아서는 마음이 편할 텐데, 어린이집 문이 쾅 닫히고 나서도 아이의 울음이 먼발치서 들려오니 선뜻 떠나지 못하고 문 앞을 서성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초반 며칠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에 1시간씩 머무를 때, 다른 아이들이 대체로 매달리거나 히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잘 노는 게 신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참여 수업 때 보니 자기 엄마와 함께 있으면 보석이와 똑같이 엄마에게 매달리고 요구사항도 많은 아이들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여기서는 의젓하게 있는데 엄마를 만나면 다들 그런다니까요."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 집에서는 유일무이한 존재지만 어린이집에 오면 어린이1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는 거 아닌가. 보석이도 그런 어린이1 중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은 자기 세상의 주인공이어야 할 나이에, 내가 일을 하겠다고 욕심부린 탓에 등장인물 중의 하나로 전락시켰다는 생각으로 죄스럽고 별 복잡한 마음이 다 들었다.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것은 아이보다 나에게 더 힘든 과정이었던 것 같다.   


 3주 차가 되었을 때, 보석이가 처음으로 울지 않고 내게 빠이빠이를 했다. 얼마나 대견하고 예쁜지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후로는 눈물바람 없이 의젓하게 나를 보내주는데,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가 나갈 때까지 세차게 손을 흔든다. 


 그래서 오늘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엄마를 보내줄까. 어떤 뜻으로 저렇게 세차게 손을 흔들고 있는 걸까. 혹시 나에게 '엄마 어서 가. 어차피 엄마를 보내줘야 하는 거잖아'하는 체념이 담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또다시 어린이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Photo by Madison Inouye from Pexels


 어쨌거나 나에게 주어진 2시간의 자유시간.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었던 책을 하나 빌리고,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마음을 다스려본다. 두 살 아이가 벌써 체념이나 거짓 의젓함을 보일 리는 없다. 하원 시키러 가보면 보석이는 소리를 지르며 뛰놀고 있고, 밥을 두 세 그릇씩 비운다고 한다. 들어갈 때 울 뿐이지 실상 아이는 잘 적응하고 있다. 어린이집은 내 염려처럼 엄마 없는 아이들이 간신히 시간을 때우는 곳이 아니었다. 2시간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내외 활동이 짜임새 있게 배정되어 있어 먹고 놀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듯했다. 


 들어갈 때 우는 것은 엄마와 헤어짐에 대한 슬픔이지, 어린이집이 싫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 가기'의 옵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 내 마음도 그렇다. '아이와 함께 일 하기' 혹은 '아이와 함께 하되 혼자 있기(?)'라는 옵션이 있었다면 굳이 아이를 기관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선택이라도 현실적 한계는 따른다. 아이가 아이대로 자기 숙제를 해내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엄마의 불안을 다스리는 숙제를 하는 중이다.  


 장대같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끼적이다 시계를 보니 보석이는 이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집에서는 점심을 도통 먹으려 하지 않는데 어린이집에 가면 아침밥 먹은 지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와구와구 잘 먹는다 한다. 심지어 식탁의자도 없이 낮은 책상에 아이들끼리 옹기종기 앉아서 저희들이 숟가락질도 해가면서 말이다. 이제 보석이를 데리러 가면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선생님들에게 세차게 빠이빠이를 해댈 것이다. 식은 커피는 남겨 놓고, 이제 그 앙증맞은 손을 잡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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