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cky Ha Feb 13. 2024

마지막 겨울 방학

    

우암산 우회도로 위에 벚나무 그늘이 더욱 짙게 드리우는 시간. 발아래 산 비아리를 꾸불꾸불 기어오르는 수동 골목길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남루한 집들에는 노랗고 푸르스름한 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감정 없이 비좁은 골목길은 갑자기 돌아가고 싶은 고향 집이 된다. 이 추운 겨울, 발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골목골목의 방마다 따뜻한 등이 켜지고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따끈한 김칫국 한 사발과 그저 곁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으로 차갑고 단단하던 마음에 온기가 돌고 말랑해지는 저녁 시간.   

   

‘저 많은 불빛 중에 들어가 내 몸 하나 뉘일 방 하나가 없다니’ 

그녀는 발아래 불빛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겨울 방학을 맞은 후배들은 각자의 집으로 불려가고 마지막 학기를 마친 선배나 동기들은 두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군대에 입대하거나 애국적 사회진출을 다짐하며 집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합법 운동 조직을 맡았던 그녀는 새로 뽑힌 후배 리더들에게 인수인계 겸 교육을 담당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청주에 남아 졸업을 앞둔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다. 언니의 직장이 이곳 이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유진이네 집에서 눈치를 보며 기생 하고 있지만, 오늘은 유진이 어머니가 원주에서 내려오시는 바람에 그나마 갈 곳이 없다. 사나흘 계신다고 하니 더욱 막막하다. 해는 기울고 날은 춥고 배는 고프고. 방을 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 후배를 물색해 봐야하나? 아무리 뜻을 같이하는 동지라지만 주인 없는 방을 빌려달라는 말은 정말 여간한 염치로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말이다. 석유 쿠폰을 주던 학생과 담당 직원도 지난 학기 학생회의 본관 이사장실 점거로 학생회 간부들에게 모든 지원을 다 끊은 상태라 각자 각출하여 겨우 난로를 때며 근근히 출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돈들이 떨어져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각자 자취방에서 웅크리고 출근을 하지 않는 상황이다. 스치로폼 위에 라면 박스라도 깔고 자볼 생각으로 터덜터덜 우회도로를 내려오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서 눈발까지 날린다. 그녀의 마음처럼 텅 빈 청암로 오르막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오가지 않고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가슴속 무언가처럼 눈만 무너지듯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 썩어빠진 중고봉고차를 한 대 사서 날 일을 하러 다니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샌님이었고 어머니는 유명 화장품 회사 직원식당 용역업체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동생은 둘이고 큰언니는 수녀원에 갔으며 작은 언니는 일찌감치 결혼하여 집을 떠났다. 일곱 식구가 사글셋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겨우겨우 대출과 빚을 얻어 엘리베이터도 없는 13평짜리 주공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이사한 게 지난 가을이다. 엄마가 식당에서 싸오는 남은 반찬을  먹었고 집이라고 올라가면 손바닥만한 아파트에 때가 쩐 씽크대며 옷들이 아무렇게 나 쌓여있는 집. 청소를 할 체력과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식구들의 쫓기는 삶이 고스란히 집 여기저기에 찌들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이미 기간이 끝나버린 자취방을 얻을 돈이 그녀에게는 없었고 집에 손을 벌릴 수는 더욱 없었다.     

 

그녀는 학교 운동권 조직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었다. 함께 운동을 하는 동지들 중에는 집안도 좀 살고 꽤 대범한 친구들도 있어서 전세금을 빼서 사글세로 옮기고 남은 돈으로 운동 자금을 내놓기도 하고 그녀처럼 사정이 좋지 않은  동지들에게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녀의 주머니에는 덕수 선배가 주고 간 생명수와 같은 2만원이 있었다. 도저히 그냥 잘 용기가 나지 않아 학교 중문 옆 슈퍼로 내려가 소주 한 병을 사고 ‘빤짝이’ 집에 들러 오뎅 천 원어치를 샀다. 따뜻한 국물을 보니 갑자기 냉장고보다 더 추운 학생회실에서 어떻게든 잘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스믈스믈거렸다. 오뎅 국물과 소주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끌어안고 다시금 눈 퍼붓는 청암로를 올라와 텅 빈 총학생회실의 불을 켰다.      


온기라고는 1원어치도 없는 학생회실. 앞뒤로 두 군데 있는 문을 잠그고 누군가 두고 간 하늘색 모포를 뒤집어쓴다. 소주를 따고 일회용 용기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나는 오뎅을 마주하고 앉는다. ‘그래, 이 소주 다 마시고 걍 자버리면 내일 아침이 와있겠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에 가져간다. 단번에 쭈욱 마신다. 소주의 명료함이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거쳐 선명한 길을 내면서 위에 내려앉는다. 그녀는 그 신랄함으로 몸을 떤다. 달다. 하얀 일회용 숟가락의 비닐봉지를 벗긴다. 아직도 김이 오르는 오뎅 국물을 소중히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조용하여 약간 무섭기까지 한 학생회실의 침묵을 깨고 선명한 전화벨이 울린다. 이토록 추운 한겨울, 그것도 방학, 하필이면 주말인 이 시간에.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는다.

“네, 24대 든든한 총학생회실입니다”

“어...? 누구세요?”

약간 취기가 감도는 여학생의 목소리다. 경상도 억양이 선명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총학생회 선전부 차장 연숙이를 떠올린다.

“연숙이냐? 나 연희선배”

“어! 연희선배!! 이런 날 거기서 뭐 하세요?”

“갈 데 없어서 여기서 소주 마시며 죽 때린다”

선명한 소주 한 잔 탓일까? 그녀는 술술 솔직하게 잘도 말한다.

그리고는 좀 사는 집안 출신인 연숙이의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이 있는 최첨단 원룸 자취방이 떠오른다. 하지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한다.

“혼자요? 언니, 날도 추운데... 저희집 가세요. 어차피 비어있는 방, 냉장고에 있는 것도 다 꺼내 드시고 보일러 얼지 않게 보일러도 좀 돌려주시고요. 내 어쩐지 학교에 전화하고 싶더라. 투쟁도 잘 먹고 잘 자야 하지요? 내사 마 거창 집에 끌려 와가 방학 중 투쟁은 참석하지 못하지마는 선배 뒷바라지는 할 수 있다 아입니꺼. 꼭 우리 집 가세요. 알았죠? 그래야 내가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고 덜 수 있습니다. 열쇠는 주방 창문 열고 안으로 손 집어 넣어보시면 거기 있어요”     


그녀는 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2월 중순에 신입생 OT 준비하러 올라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으이소. 다른 데 갈 생각하지 마시고요. 기름도 넉넉하게 넣고 왔으니 그때까지 충분할 낍니더”

그녀는 목까지 올라오는 눈물을 꾹 참고 호기롭게 말한다.

“그래? 그럼, 이 선배가 오라는 많은 경쟁 자취방을 모두 물리치고 ‘턱별히’ 연숙의 자취방에 성은을 베풀어 이용해 주셔볼까나? 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의 어느 겨울 아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