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을 믿지 마세요

세탁소에서 깨달은 인간 기억의 불확실함

by 우주진


남편 간절기 코트를 찾으러 세탁소에 갔다.

(아직 한여름이지만, 미리 미리 가을을 준비하는 중)


사장님이 비닐 씌운 군청색 코트를 내미시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게 남편 옷이 맞나?

내가 알기로 남편 코트는 OOO 브랜드였는데?

라벨에 적힌 브랜드 이름이 너무 낯설었다.


사진: Unsplash의Waldemar

마침 남편에게서 다른 이유로 전화가 왔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다.

“당신 코트 OOO 거야?”

남편 왈, “어? 모르겠는데. 기억 안 나는데.”


봄 가을내내 입고 다닌 옷을 당사자가 모른다니.

어쨌건 사장님이 알아서 주셨겠거니 하고 집에 들고 와서 비닐을 걷고 다시 보니 남편 옷이 맞았다.


분명히 내가 남편이랑 같이 가서 이 옷을 샀는데, 왜 다른 곳에서 샀다고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남편은 왜 자기 옷의 브랜드도 전혀 기억을 못할까?


뭐, 둘 다 나이 들어가니 인지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세월이 야속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갑자기 이런 걱정이 드는 거다.

아, 나는 절대로 믿을 만한 목격자가 될 수 없겠구나.


드라마 속 목격자들은 밤중에 골목에서 마주친 사람의 얼굴에 점이나 팔의 문신 문양까지 다 기억해 내고, 심지어 어떤 인물은 자기가 어릴 때 보았던 범인 얼굴까지 떠올리던데.


만약에 나라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무슨 일이 났다고 치자.

사건이 일어난 직후 내가 아파트 현관에서 급히 뛰어가는 낯선 사람을 보았다면?


경찰이 와서 묻는다.

경찰 : 그 사람 인상 착의를 설명해 주시죠.

나 : 어, 키는 나보다 크고(내가 작기 때문에 대부분은 나보다 크다), 그냥 티셔츠에 바지 입고 운동화 신었어요.(이러고 다니는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경찰 : 안경을 썼나요?

나: 어, 그건 잘 몰라요.

경찰 : 헤어스타일은?

나: 단발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경찰 : 단발이었으면 여자였나요?

나: 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평범한 여성으로 용의자를 좁히고 수사를 했는데, 잡고 보니 범인은 남자였다는. 결국 나는 수사를 교란시킨 목격자가 된다. 흑흑.


하지만 이런 게 주변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나만의 문제이거나 나이 들어 인지력이 떨어져 생기는 그런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읽었던 <정리하는 뇌>라는 책에 보면, 기억은 허구라고 한다.

왜냐하면 기억은 왜곡에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고쳐쓰기’에 가깝다.

책에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만 적어보겠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경미한 자동차 사고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후에 참가자를 나누어 절반에게는 자동차가 ‘접촉했을 때‘, 나머지 절반에게는 자동차가 ‘충돌했을 때‘ 두 차의 속도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접촉과 충돌 한 단어만 바꿨는데도 자동차의 속도 추정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충돌이라는 단어가 기억을 바꾼 것이다.


사진: Unsplash의Tyler Clemmensen

게다가 일주일 후, 그때 본 동영상에 유리가 깨진 장면이 있었느냐고 묻자, ’충돌’이라는 단어로 질문을 받았던 참가자들이 훨씬 더 많은 비율로 깨진 유리를 보았다고 했다.(사실 깨진 유리는 없었다.)

이렇게 단어 하나가 기억을 바꾼다.


결국, 인간이란 보편적으로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오늘의 결론:

“내가 해봤어”, “내가 직접 봤어” 같은 말이 사실이더라도 100% 믿지는 말자.

내 기억도. 남의 기억도.

우기기 없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