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로 만나는 파리 여행 (3)
지난 글 말미에 적었듯이, 나는 이야기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성서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 천착했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작품을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상주의가 태동된 시기에도 끝까지 비극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세계를 그렸다.
그가 살았던 4층짜리 집이 현재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되어 있었다.
구글맵을 보면서 찾아간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Musée Gustave Moreau)은 주택가에 자리 잡은, 저택이었다.
입구의 문은 크고 육중해 보였으며, 굳게 닫혀있었다.
개관시간을 확인하고 왔기 때문에,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출입문을 자세히 둘러보니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오늘은 문을 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몇 팀이 더 와서 문을 열어보려다가 안내문을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안내문을 미처 보지 못하고 계속 문을 열려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문을 닫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 놓고도 우리는 정작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꼼꼼하게 짜 두었던 여행 일정표는 이렇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너무 구체적인 계획은 늘 우리를 배신하기 마련이라는 걸, 이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날 이후에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며칠에 한 번씩 일정표를 다시 써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장대비가 내리는 날, 고쳐 쓴 일정표에 따라 다시 이곳을 찾았다.
미술관의 0층에는 리셉션과 전시 공간이 있었는데, 그날은 문화유산의 날이라 특별행사가 있어서 우리는 그곳의 전시관엔 들어가지 못했다.
1층은 그가 살았던 주거 공간으로, 당시의 상태에 가깝게 보전되어 있었다.
예전에 작업실로 쓰였던 2층과 3층에는 그의 주요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미술관처럼 그림이 여유 있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의 벽면이 가득차게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그래서 그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에는 그림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에 큰 관심이 없는 남편도 이 미술관에서는 흥미를 보였는데, 그림의 소재가 자신도 아는 성서와 신화 속 내용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점이 바로 나에게도 가장 큰 매력이었다.
가장 눈에 띈 그림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벌로,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신. 프로메테우스.
신화 관련 책들에서 삽화로 이미 여러 번 보아서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실제 그림 앞에 서니 전혀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스케치도 내 마음을 끌었다.
책에서는 유화로 그린 그림을 보았는데, 그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중이라, 아쉬운 대로 이 곳에서 만난 스케치로 만족해야 했다.
오이디푸스에게 붙어있는 스핑크스의 모습이 매혹적이면서도 여유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오이디푸스가 질문의 답을 맞추고 나면, 절벽에서 떨어질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스핑크스의 모습이 약간은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살로메와 세례요한을 그린 <출현>.
살로메의 손가락 끝에 세례요한의 잘린 머리가 떠 있다.
살로메의 포즈도 예사롭지 않지만, 참수된 머리가 공중에 떠서 빛나는 모습은 더욱 기괴하다.
뒤에 색채 없이 흐릿하게 보이는 헤롯왕의 모습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이 그림만 보면 1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신약성서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아주 먼 옛날을 배경으로 하는 잔혹한 동화처럼 느껴졌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마도 한 때 <신화의 힘>을 쓴 조지프 캠벨이나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에 빠져서 신화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으로 재해석된 이야기들은 내 머리 속 상상력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미술관에는 꼭 봐야하는 하이라이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나선형 계단이다.
자유롭게 구불거리는 모양새, 철재와 목재의 균형, 아르누보 스타일의 곡선 장식들.
그 계단을 올라가면 현실 세계를 벗어나 신화의 세계에 다다를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작은 미술관이라서 관람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여운은 길게 남았다.
신화 속 꿈을 길게 꾸고 깨어난 듯,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