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로 만나는 파리 여행 (7)
“내일 프랑스 총파업한다는데? 미술관 박물관도 다 닫고, 버스 지하철도 안 다닌대.”
베르사이유 궁전 관람을 마치고 근처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마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시내에서는 시위대의 대규모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들게 짠 일정표가 또다시 뒤틀리는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달 전에 예약해 둔 베르사이유 궁전과 루브르 박물관 방문일이 총파업과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겹쳤다면 이후 방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속상한 건 비싸게 산 박물관 패스 6일권 중 하루를 날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전혀 모르니 파업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없었지만, 당장 내일의 일정이 꼬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옆에서 남편은 묘하게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루 쉬면 어떨까 하는 그런 기대.
물론 택도 없는 기대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우리의 일정표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고, 문을 닫지 않을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숙소에서 걸어서 25-30분 거리에 페르라셰즈 공원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 날 페르라셰즈 묘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내 가슴은 조금 떨렸다.
이렇게 존경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니.
페르라셰즈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쇼팽의 묘, 오스카 와일드의 묘, 짐 모리슨의 묘라고 했다.
나는 더 욕심을 내었다.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프루스트, 몰리에르, 피에르 부르디외.
거기에 들라크루아, 막스 에른스트와 모딜리아니까지.
음악에는 조예가 없지만 쇼팽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참, 음악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는 짐 모리슨의 묘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나는 이 정도면 소박한 소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묘지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큰 공원묘지로, 면적이 43헥타르에 이른다고 했다.
이렇게 유명인들이 많이 묻혀 있는데 작은 규모일 리가 있겠는가?
나는 방문하고 싶은 인물들의 이름과 묘역 번호 그리고 대략적인 동선만 미리 체크해 두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한 구역 안에서도 원하는 비석을 찾는 일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는 낫겠지만, 나에게는 거의 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구글 지도와 공원묘지 앱, 다른 방문객들이 올린 사진까지 총 동원해 보물찾기 하듯 무덤 사이를 헤매어야 했다.
길은 돌길이라 울퉁불퉁했고, 발목은 점점 아파왔다.
비석에 새겨진 알파벳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피로가 쌓여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만나고 싶었던 예술가의 묘를 발견할 때마다, 피로를 상쇄할 만큼의 도파민이 솟는 것 같았다.
관광객 뿐만 아니라, 지인이나 친지의 묘를 찾은 사람들도 보였기 때문에, 묘지의 분위기는 다소 숙연하고 조용했다.
내가 이곳을 일정에 넣은 이유는 발자크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발자크의 묘석 위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집에서 보았던 흉상들보다 단정한 인상이었다.
세월의 풍화를 겪은 석제 비석은 초록색으로 세월의 이끼가 얹혀있었다.
그의 생몰 연도는 청동 나뭇잎 장식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나뭇잎에 띠가 둘러져 있어 얼핏 보면 횃불처럼 보였다.
작가란 어쩌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인간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피고,
글이라는 횃불을 들어 그것을 잘 보이게 하는 사람 아닐까.
혼자 그런 생각해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는 크고 또 현대적인 천사 조각상이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사방에는 유리벽이 둘러져 있었다.
이 유리벽엔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고, 이게 바로 유리벽을 친 이유라고 했다.
전 세계의 팬들이 그의 묘비에 키스를 남겼는데, 립스틱의 성분이 묘비를 손상시켜서, 이 유리벽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의 묘비에 도착했을 때, 마침 가이드가 몇 사람을 앞에 두고서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영국에서 동성애 혐의로 2년간 노역생활을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쫓기듯 파리로 와서, 여러 호텔을 전전했는데, 그가 하루밤만 묵은 호텔조차도 오스카 와일드가 묵은 숙소라고 홍보를 한다고.
얼마 전에 나는 그가 감옥에서 쓴 옥중기 <심연으로부터>를 읽었다.
그의 묘지를 방문했을 때에도 참으로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은 후에는 젊은 날의 성공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감옥에서 쓴 글인데도 (신세한탄도 있기는 하지만)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예술가의 영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이 공원묘지 한 쪽에는 납골당도 있었다.
거기 한 곳에 내가 좋아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있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막스 에른스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난감했는데, 다행히 AI의 도움으로 그의 납골당 번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그의 그림들을 좋아했지만,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독일 사람인 그가 왜 파리에서 사망했을까?
그 대답은 얼마 전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갔다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했고, 나치 점령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그의 예술이 독일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파리다운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생활도 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으로 쫓기듯 갔을 때 그는 그것을 고난으로 생각했겠지만, 예술가에게 여러 나라의 삶은 분명히 긍정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결국 나는 위에 언급한 작가와 화가, 그리고 음악가의 묘를 모두 방문했다.
힘들어하는 남편을 끌고서.
겨우 두 시간을 좀 넘게 걸었을 뿐인데, 남편은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여행에는 1도 관심 없는 사람인데, 부인때문에 고생이 많다.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모딜리아니의 묘를 마지막으로 이제 돌아가자고 하니, 남편의 얼굴이 환해졌다.
인터넷으로 이 근처 한식당을 찾아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심을 먹고는 바로 숙소에 가서 오후에는 조용히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나는 생생한 도시 파리에 와서, 왜 이렇게 죽은 이들을 힘들게 찾아다녔을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죽은 이들이 남긴 파리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파리는 과거의 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총파업으로 들썩이는 21세기 파리의 한복판에서 나는 과거의 파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날,
내 마음은 계속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