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뜨가 준 선물, 몽마르뜨 미술관

문학과 미술로 만나는 파리 여행 (9)

by 우주진


이번 글에서는 파리의 낭만,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보려 한다.


피카소도 한때 머물렀던 몽마르뜨 언덕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임대료가 저렴했고, 언덕 위에는 풍차와 포도밭이 있던 시절이었다.

19세기 말, 르누아르는 이곳에 아뜰리에를 얻고,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같은 작품을 그렸다.

그 이후 여러 유명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 아뜰리에가 지금은 몽마르뜨 미술관(Musée de Montmartre)이 되었다.


문학과 미술로 만나는 파리를 주제로 내세운 여행이니 몽마르뜨 미술관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정보라고는 이곳이 르누아르의 아뜰리에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말하자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선물 상자의 포장을 벗기는 기분으로 그곳을 방문한 셈이었다.


몽마르트의 포도밭


우리를 먼저 맞이한 것은 초록빛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정원 주변으로 오래된 집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고, 이 지역에 유일하게 남았다는 작은 포도밭도 보였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관 안에는 몽마르뜨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적잖이 걸려 있었다.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카바레들의 광고 포스터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백 년도 더 된 포스터라기에는 아주 세련되고 예쁘기까지 해서 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바레 포스터들



그런데 이 곳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이름이 있었다.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수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이면서, 스스로도 예술가가 된 여성.


1912년부터 그녀가 이곳을 작업실로 썼다는 사실은 여기에 와서야 알았다.

시골에서 파리로 온 그녀는 처음에는 르누아르와 툴루즈 로트레크 등 예술가의 모델로 일하기 시작했다.

모델은 당시 젊은 여성이 꽤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모델 일을 하면서 작가들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국립미술협회 살롱전에 입선한 최초의 여성화가가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예술가의 뮤즈가 아닌, 스스로 예술가로 서게 된다.


발라동 작
아들 위트릴로의 초상, 발라동 작
자화상, 발라동 작


발라동은 자신과 자신의 파트너인 위테르의 누드를 그림으로써, 미술사상 최초의 남성 누드를 그린 여성 화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의 그림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니 후기 인상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강렬한 색과 검은 윤곽선 때문인지, 나에게는 오히려 표현주의에 가깝게 보였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보다 표현주의를 조금 더 선호하고 있는 처지라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술관은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는 발라동의 거주 공간과 작업실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은 그녀와 아들 위트릴로, 그리고 파트너 위테르가 함께 지내며 작업하던 장소라고 한다.

아들인 위트릴로 역시 몽마르뜨를 주로 그린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주변에서는 이 세 사람을 지옥의 3인조(Le Trio Infernal)라고 불렀다고 한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을까?

독립적인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아들, 그리고 아들보다도 어린 그녀의 연인.

그들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 눈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관계가 이 몽마르뜨에 어울리는 낭만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된 발라동의 작업실


아파트와 작업실은 크지 않았다.

세 사람이 쓰기에는 조금은 좁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창문이 넓어 빛이 잘 들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에는 물감과 붓 등이 놓여 있었는데, 실제로 그녀가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 오래되어 보였다.


완벽히 재현된 공간은 아닐지라도, 그녀가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했다.


관람을 마친 후 정원에 있는 카페 르누아르에서 차 한 잔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푸른 잔디와 정원을 바라보며 오늘 본 그림들을 떠올리면서 차 한 잔을 하고 마무리했다면 더 행복한 하루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선물의 포장을 뜯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좋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수잔 발라동이라는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