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lcázar of Segovia
수도교를 둘러본 뒤, 우리는 세고비아 알카사르로 향했다. 알카사르(Alcázar)는 아랍어 Al-Qasr에서 유래한 말로 성이나 궁전을 뜻한다. 이 성이 유명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디즈니 <백설공주> 속 성이 바로 이곳을 모델로 했다는 점이다. 멀리서 보니 과연 뾰족한 첩탑과 지붕, 요철 모양의 성벽까지, 딱 동화 속 공주가 살 법한 곳처럼 보였다.
입장권을 구입한 후, 매표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메뉴는 특별할 것 없는 고기와 야채였지만, 후식으로 츄러스를 쵸콜릿 딥에 찍어 먹으니 왠지 특별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건축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나중에 이 성에 대해 검색해보니 처음 건축이 시작된 것이 12세기 초였고,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쳤다고 한다. 그래서 고딕, 로마네스크, 무데하르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고 했다.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란, 기독교가 스페인을 되찾은 뒤에도 남아 있던 이슬람 장인들이 기독교 건물에 남긴 이슬람 스타일의 예술을 말한다. 말하자면,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예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 투어를 시작했다. 유럽의 성들을 많이 보다 보면 차이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서, 솔직히 이 성이나 저 성이나 다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왕권이 절대적이었던 나라의 궁전은 몹시 화려하다는 특성이 추가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성들은 달랐다. 아마도 앞서 언급했듯, 무데하르 양식의 미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문과 창의 형태가 다르다. 네모나지 않고, 윗부분이 중앙으로 뾰족하게 모이는 곡선의 아치 형태를 띤다. 각 방의 천장에는 이슬람 스타일의 기하학 무늬들로 금칠이 되어 있다. 감정 따위는 다 배제한 듯한 규칙적인 반복. 화려하면서도 절제미가 있다. 게다가 아치형 창문으로 보이는 들판 풍경이 무척이나 목가적으로 보였다. 햇볕이 부족함 없이 고루 비치는 너른 평야에 낮은 관목들과 풀이 자라는 평화로운 모습. 옛날에 이곳의 영주나 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목가적으로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내 눈에 비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성 내부를 다 둘러보고 나면, 성벽에도 올라가 볼 수 있다. 돌로 된 바닥, 요철 형태로 이어진 성벽 상단, 그리고 온갖 무기가 전시된 무기 저장소를 보니, 현실 감각이 사라지고 중세 전투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 스페인의 거리낌없이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쫙 펴지면서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바라보는 들판의 풍경은, 아까 창을 통해 본 장면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평온했다.
왕국의 통합과 신대륙 항해를 지원했던 그 유명한 여왕 이사벨 1세가 이 성에서 즉위 선언을 하였다고 하니, 이 곳을 그냥 지방의 한 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 성을 걷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전생이 공주였다면, 이 성에서 살지 않았을까? 어릴 때부터 공주병 아니냐는 소리를 자주 듣고 자란 김에, 유럽의 수많은 성들 중 어느 곳이 내 성이었을까 굳이 고르자면, 바로 이 세고비아 알카사르가 내 취향이다.
참, 이번 그림에서는 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단순화해 담아보았다. 실제 건물은 더 복잡하고 장식도 많지만 이번엔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왼쪽 아래에는 성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 한 명을 그려넣었는데, 보는 사람도 그 길을 따라 알카사르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