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정윤 작가님 소설 기초 글쓰기 6주차 과제_간결하게 쓰기

by 유연

엄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불 꺼진 방안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둠 속 티브이에선 만화 영화 빨간 머리 앤이 한창이었다. 만화를 보는 엄마의 눈빛은 화면의 빛보다 더욱 깊게 빛났다. 엄마는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나에게 만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이불보다 포근했다. 나는 만화 대신 엄마의 옆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엄마는 나의 다섯 살 인생, 세상의 전부였다.


아빠가 할머니의 꾀임에 넘어가 집을 나가면서부터, 엄마와 나 사이에는 크고 작은 틈이 생겼다.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고는 간신히 면했으나 살림은 여전히 팍팍했다. 엄마의 얼굴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고 피로와 우울감이 먹구름처럼 끼었다. 더 이상 다정한 목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엄마는 내가 아빠의 역할을 대신하길 바랐지만 나는 엄마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내가 마음을 다잡기엔 풀어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서로의 상처가 보일 리 만무했다.


어느 날, 독서실에 가방만 두고 놀다가 늦게 귀가한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면서 심하게 다투었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엄마가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다.”라고 토해냈다. 말문이 막혔다. 엄마가 죽어버리면 나는? 동생들은?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라며 받아치는 대신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결국 엄마와 나는 벌어진 틈을 좁히지 못했다.


결혼 후 아이가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오후 세 시밖에 안 되었는데 나는 벌써부터 지쳐있었다. 아침부터 아이가 틈나는 대로 속을 썩여서였다. 이제는 좀 괜찮겠지 싶을 때쯤 아이가 또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배고프거나 졸려서가 아닌, 이유 없는 짜증에 숨이 턱 막혀왔다. 제발 그만해. 뒤따라오는 아이를 밀어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등 뒤에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애써 못 들은 척 하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얼굴에 먹구름이 낀 엄마가 서 있었다. 죽어버리고 싶다고 내 앞에서 울부짖던 엄마를 이십 년도 더 지나 마주했다. 엄마는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절망뿐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보낸 신호였다.


아이의 엄마로 사는 요즘은 인생을 세 번 사는 기분이다. 무수한 제약이 걸린 생활 속에서도 나 자신을 지키려는 삶과, 아이와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을 여행하는 삶, 엄마의 지나온 시간을 지금 엄마가 된 나의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삶 말이다. 오래전 좁히지 못했던 엄마와 나 사이를 채워 나갈 준비를 마친 것 같다. 나의 세상이었던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저물지 않는 태양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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