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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규 Oct 22. 2018

교만의 착각

당신은 교만하다는 말을 들어 본 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 스스로 교만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쉽게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남을 쉽게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강하거나 명예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쉽게 경외에 빠져든다. 그 이유는 당연한 사실이다. 자신만의 확고한 관점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확고한 관점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돈, 학벌에 따라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인격이 마치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취급해 버린다.

그들은 단지 당신보다 몇 년 앞서는 경력, 남부럽지 않은 학벌, 혹은 경제적 우위, 직장에서의 위치로 오만한 허영심에 가득 차 인생을 착각 속에 살아간다.

세상의 가치를 돈과 명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 부류는 세상의 가치를 공익과 헌신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이 있다. 돈과 명예를 가치로 삼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지갑 속에 금액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한다. 상대방의 가치를 지폐 한 장으로 평가하려고 든다.

100원을 모으면 천원이 되고 천 원을 10장 모으면 만원이 된다. 만원을 갖고 있다고 세상의 가치를 모두 얻은 것은 아니듯이 1,000원의 기적은 만원을 만들 수 있는 가치를 갖고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자도 호랑이도 아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은 열등감, 모멸감 일 것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람들을 보면 함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람들이 취약함 약점을 이용하여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바로 모멸감이다.

“너는 어떠한 사람일 뿐이야”라는 일방적인 규정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사람을 규정짓는 부정적 감정이다.

규정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당신이 기준을 정해놓고 정해놓은 것 외에 모든 것은 더 이상 아님을 스스로 가두어 버린 틀이다. 일을 하다 보면 저 사람 참 답답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답답한 감정은 당신이 규정해 버린 자신의 잣대일 뿐이다. 답답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당신의 규정과 비교하여 생겨난 감정 일 뿐이다. 상대방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을 한 단어로 판단하는 것은 당신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규정지으려는 것과 똑같다.

삶의 기준을 학력, 돈, 명예에 따라 상대방을 규정지으려는 것은 단지 연봉, 학벌 외에 상대방이 갖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잠재적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짜인 틀과 규정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로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규정에 따라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마치 퍼즐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검사의 결과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자신을 이해하고 노력하고, 또는 알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인간의 삶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살다 보면 부부 사이, 친구사이, 직장 동료 사이에서 사람을 규정짓고 판단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상대방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람은 현재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사람은 어려움이 생기면 이겨 낼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이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앉자마자 울며 누군가에서 모멸감과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 마주침도 못하는 학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상대방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누군가에 기준에 따라 소리 없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폭력이다.

폭력은 상대방을 생매장시키는 것과 같다. 상대방을 이미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규정짓고, 상대방의 약점을 다 알고 있으니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스피노자는 교만이라고 표현하였다.

교만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경계선에 있는 감정이다. 교만은 자기규정에 따라 삶의 목표가 이루어지면 자기 만족감으로 기쁨이 되지만 때로는 자신의 기쁨이 송두리째 달아나 버리면 온갖 슬픔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타락한 루시퍼 천사처럼 인간은 한순간에 교만에 휩싸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한 순간에 슬픔으로 다시 내려앉고 만다. 중간시대에 서 있는 교만은 늘 정해져 있고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감정이다. 즉,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만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데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모든 현상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이 교만하게 보이는 것은 당신의 규정에 의해 그려진 이미지 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신도 아닌 당신을 평가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교만하다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교만한지 못한 지 판단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거울을 못 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거울을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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