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들리와 KB국민카드의 협업 이야기
프롤로그: 2019년 12월, 한 기술 스타트업의 마지막
2019년 12월, 사운들리라는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2012년 창업 이후 7년의 여정이었죠. 국내 21건, 해외 9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일간 300만 명 이상에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36개 이상의 TV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던 이 회사가 결국 폐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구글이 백그라운드 마이크 접근을 금지하면서 그들의 핵심 기술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 7년 동안 사운들리가 만들어낸 협업 사례들, 특히 KB국민카드와의 퓨처나인 1기 협업은 10년 가까이 오픈이노베이션 현장에서 일한 제가 봐도 여전히 교과서적인 케이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지점, 즉 "OI담당자와는 잘 통하는데 왜 일이 안 될까?"라는 함정을 정확히 우회했기 때문입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의 가능성
사운들리의 김태현 대표는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IUC)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지 일자리 제안도 거절하고요. 그가 본 것은 비가청 음파 통신 기술의 가능성이었습니다.
기술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18kHz까지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향장비는 22kHz까지 재생과 녹음이 가능하죠. 사운들리는 그 사이, 18-22kHz 대역을 활용했습니다.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스마트폰 마이크는 감지할 수 있는 소리에 모르스 부호처럼 디지털 정보를 담아 전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술의 차별점은 명확했습니다. 블루투스나 WiFi처럼 별도 하드웨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만으로 구현 가능했죠. 사용자가 별도 모드를 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TV를 보거나 매장에 있으면 자동으로 작동했습니다. UIUC, 서울대, 한양대, GIST 출신 석박사들이 모여 만든 이 기술은 경쟁사 대비 10배 이상의 수신 성공률을 자랑했고, 방송 규격도 만족했습니다.
창업 초기 아이디어는 식당 예약 서비스였습니다. 시장조사 부족으로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음파 통신 기술에 대한 확신이 김태현 대표를 움직였습니다. 그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단방향 아날로그 미디어를 양방향의 디지털 미디어로 바꾸자."
TV 홈쇼핑이 첫 번째 시장이었습니다. 3분 이상 시청하는 고객은 구매 관심도가 높다는 데이터가 있었죠. TV에서 비가청 음파를 송출하면, 시청자의 스마트폰이 이를 감지해 이벤트 알림이나 제품 상세 페이지를 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TV를 보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즉 세컨드 스크린 사용자를 공략한 전략이었고, 효과가 좋았습니다. TV 광고주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성장하는 스타트업,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
2014년 5월, 매쉬업엔젤스의 이택경, 류중희(현 퓨처플레이 대표) 파트너로부터 개인 엔젤투자를 받았습니다. 9개월 후인 2015년 2월에는 L&S벤처캐피탈로부터 8억 원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기술은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롯데시네마와 제휴하여 국내 극장 업계 최초로 스크린-모바일 인터랙티브 캠페인 '바로쿠폰'을 선보였습니다. 관람객이 광고를 보면서 휴대폰을 흔들기만 하면 즉석 쿠폰이 지급되는 서비스였죠. 전국 달콤커피 매장, 홈쇼핑 생방송, EBS 세계테마기행, 서울 지하철 2/3/4호선 안내 방송, 대학 출결 시스템까지. 일간 사용자 수는 3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2015년 터키 최대 은행 아카뱅크와 TV-모바일 연동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을 때는 놀라운 성과가 나왔습니다. 푸시 메시지 클릭률(CTR) 7.4%로 일반 대비 3-4배, 전환율 19.14%를 기록했습니다. 해외 시장도 열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사운들리에게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차별화된 기술을 보유했음에도 고객 접점 확보가 어려웠던 것이죠. 여러 대기업을 찾아가 기술을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흥미로운 기술이네요. 그런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죠?" 구체적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막막해했고, 결국 초기 스타트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신규 개발 요청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운들리는 자신들의 기술을 캐쉬슬라이드와 KT Clip앱에 집어 넣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본 계약조건은 놀라우리만큼 사운들리에게 불리했지만, 고객 접점확보 측면에서는 오픈이노베이션이 활성화되기 전인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걸로 생각합니다.
퓨처나인 1기: 게임 체인저를 만나다
2017년, 사운들리는 KB국민카드의 퓨처나인 1기에 선발되었습니다. 펫닥, 모두의주차장 등과 함께한 9개 스타트업 중 하나였죠. 김태현 대표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음파 기술이 금융 서비스 그리고 고객과 만나면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음파 기술은 TV 광고뿐만 아니라 결제 인증, 고객 프로모션 등 다양한 쓰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운들리의 기술이 카드사가 가장 원하는 것, 즉 "공격적인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KB국민카드도 가능성을 봤습니다. 당시 카드업계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간편결제 서비스들이 부상하면서 전통적 카드 사용이 감소하고 있었죠. KB국민카드는 단순히 카드를 발급하는 기업을 넘어, 고객의 생활 전반에 가치를 제공하는 회사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사운들리의 음파 기술은 신규 카드 발급과 이용률 증대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고객에게 혜택을 카드 사용 전에 선제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흥미로운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죠.
김태현 대표의 협업 전략: OI담당자를 우회하라
여기서부터가 이 사례의 핵심입니다. 김태현 대표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OI담당자와만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첫 미팅 후 그가 한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마케팅 현업 분들과 직접 만나서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논의해볼 수 있을까요? 담당자님도 함께 참석하셔서 저희가 제안하는 내용이 실제로 구현 가능한지 검토해주시면 좋겠어요."
OI담당자는 조금 망설였지만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김태현 대표는 KB국민카드의 광고담당자, 마케팅담당자의 연락처를 직접 받았습니다. 현업 담당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메일로 제안서를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OI담당자는 중개 역할만 할 수 있게 포지셔닝했고, 빠르게 현업과 직접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카드사의 핵심 KPI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카드사의 양대 KPI는 명확합니다. 첫째, 고객의 지갑에 카드를 넣는 것. 즉 신규 고객 확보입니다. 둘째, 결제할 때 그 카드를 꺼내게 만드는 것. 즉 이용률 증대입니다. 사운들리의 음파 기술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었습니다.
현업 마케팅팀과의 미팅에서 대화는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고객들이 홈쇼핑 보면서 카드 혜택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건가요?"
"네, TV에서 특정 상품 광고가 나올 때 비가청음파를 함께 송출하면,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인식해서 'KB카드로 구매하면 10% 할인'이라는 알림을 띄울 수 있어요. 신규 발급 혜택과 연결하면 지갑에 카드를 넣는 마케팅이 되는 거죠."
"오... 그럼 매장에서도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매장 입구나 특정 상품 코너에서 음파를 송출하면, 그 위치에 있는 KB카드 앱 고객에게만 맞춤형 혜택을 제공할 수 있어요. 결제 직전에 '지금 이 매장에서 KB카드 쓰면 10% 할인'이라는 메시지가 뜨는 거예요. 카드를 꺼내게 만드는 마케팅이죠."
여러 번의 미팅과 논의 과정을 거쳐 구체적인 협업 방안이 도출되었습니다.
프로젝트 1: KT Clip 연동, 마케팅의 혁신
첫 번째 프로젝트는 타사 앱을 활용한 신규 고객 확보였습니다. KT의 선탑재 앱인 'KT Clip'에는 이미 사운들리 SDK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앱과 캐시슬라이드 앱 사용자를 대상으로 홈쇼핑 방송과 연동한 마케팅을 진행했습니다.
작동 방식은 이랬습니다. 홈쇼핑 방송 시청 중 TV에서 비가청 음파가 발송됩니다. KT Clip이나 캐시슬라이드 앱을 설치한 사용자의 스마트폰이 음파를 자동 감지하죠. 그러면 "KB국민카드 이용 시 할인 혜택" 푸시 알림이 제공됩니다. 지갑에 카드를 넣는 마케팅이었습니다.
KB 알파원카드 TV 광고 캠페인에서는 더 직접적인 접근을 했습니다. 15초의 짧은 TV 광고 속에는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습니다. 사운들리의 음파 기술을 광고에 삽입해서, 광고 종료 시점에 광고 쿠키 영상 등을 통해 카드 사용방법, 상세 혜택 등을 모바일로 추가 전달한 것이죠.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20만 명이 해당 푸시 광고를 시청했고, 일반 광고 대비 약 10배 높은 반응률을 달성했습니다. TV 광고라는 매체가 가진 근본적 한계, 즉 "누가 봤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막대한 광고비를 집행하면서도 정확한 시청자를 파악할 수 없었던 시대가 끝나고, TV 시청자의 행동정보를 분석하고 트래킹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프로젝트 2: 오프라인 마케팅의 패러다임 전환
두 번째 프로젝트는 더 혁신적이었습니다. 마트 및 오프라인 행사장에서 음파를 이용해 KB카드 앱 고객에게 정보와 프로모션을 안내하는 것이었죠.
당시 카드사의 오프라인 마케팅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플랜카드를 붙여놓고 "10만 원 이상 구매 시 1만 원 상품권 제공"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전단지, 입간판, 안내방송. 누가 KB카드 고객인지, 누가 실제로 관심 있어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타겟팅이 불가능했던 거죠.
사운들리의 솔루션은 이랬습니다. KB국민카드 통합 앱에 사운들리 SDK를 연동합니다.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에서 비가청 음파를 송출합니다. 매장에 들어온 고객 중 KB카드 앱을 설치한 사람의 스마트폰만 이를 감지하죠. 그러면 "지금 이 매장에서 KB카드로 10만 원 이상 결제하시면 1만 원 캐시백" 같은 프로모션 알림이 뜹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적용이 아니었습니다. 선제적 혜택 제안의 시작이었죠. 고객이 계산대에 가기 전에, 카드를 꺼내기 전에, 먼저 "지금 여기서 이 카드 쓰면 이득이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카드를 꺼내게 만드는, 이용률 증대의 핵심 솔루션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제가 발의하였고, 현업이지만 IT개발에 능숙한 제 입사 동기의 도움으로 요건으로 만들어졌고, 서로 미루는 현업들과 수십번의 미팅과 협의를 통해 어찌어찌 개발은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드로이드의 새로운 보안 정책 이슈로 시장에 출시되지 못했습니다. 구글이 자사 서비스 외에는 백그라운드에서 마이크 접속을 금지하면서, 사운들리의 핵심 기술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면
10년차 오픈이노베이터로서 제가 지금 봐도, 만약 KB국민카드 통합 앱에 사운들리 SDK가 정상적으로 들어갔다면 한국 카드사 마케팅의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1,900만 KB카드 고객이 직접 음파를 감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TV를 보다가, 매장에 가다가, 영화관에서, 지하철에서. 모든 곳에서 실시간으로 혜택 알림을 받는 거죠. 타겟팅이 불가능했던 모든 오프라인 접점이 디지털 마케팅 채널로 전환되는 겁니다.
카드사의 마케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우리 가맹점 어디든 들어가면 자동으로 혜택 알림이 뜹니다." 이게 되는 거거든요. 고객 입장에서는 별도 쿠폰을 챙길 필요도 없고, 카드사 입장에서는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고객에게만 마케팅 비용을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최근에서야 모바일할인쿠폰 등을 통해 유사한 서비스를 일부 카드사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구글의 정책 변경으로 이 모든 가능성은 사라졌고, 사운들리는 2019년 12월 폐업했습니다. 7년간 쌓아온 기술과 협업 경험은 2020년 2월 애드테크 스타트업 온누리DMC(현 모티브 인텔리전스)에 특허권이 인수되면서 다른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10년차 오픈이노베이터가 배운 것들
제가 이 사례를 여전히 기억하고, 지금도 교과서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성공했다면 '초심자의 행운'으로 어마어마한 임팩트가 있는 오픈이노베이션 사례를 만들수도 있었겠지만, 김태현 대표가 보여준 협업 방식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놓치는 핵심을 정확히 짚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OI담당자는 중개자일 뿐입니다. 실제 의사결정권자는 현업입니다. KPI를 책임지는 사람, 예산을 집행하는 사람, 성과로 평가받는 사람. 그들과 직접 대화해야 합니다. OI담당자와 아무리 잘 통해도, 현업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 KPI를 정확히 터치해야 합니다. 추상적인 "혁신", "협업", "시너지" 같은 단어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임팩트를 제시해야 합니다. 카드사라면 신규 고객 확보와 이용률 증대. 그게 전부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멋져도, 그 숫자를 움직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셋째, 단계적 검증으로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사운들리는 타사 앱(캐쉬슬라이드, KT Clip)으로 먼저 기술을 검증했습니다. TV 광고로 20만 명, 10배 반응률이라는 성과를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프라인 확장을 시도했고, 마지막으로 자사 앱 연동을 추진했습니다. 작은 성공을 쌓아 큰 협업으로 가는 과정이었죠.
넷째, 상대방이 편한 방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김태현 대표는 현업 담당자들에게 메일로 체계적인 제안서를 전달했습니다. 그들의 업무 방식을 존중한 거죠. 급하게 미팅을 요청하거나, 자기 방식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기술을 팔지 마세요. 문제 해결을 파세요. 사운들리는 "음파 기술"을 판 게 아닙니다. "타겟팅이 불가능했던 TV 광고와 오프라인 매장을 디지털 마케팅 채널로 바꾸는 솔루션"을 판 거예요. KB카드가 원했던 건 신기한 기술이 아니라, 신규 고객을 확보하고 카드 이용률을 높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실패한 스타트업이 남긴 것
사운들리는 실패했습니다. 구글의 정책 변경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이었지만, 결국 폐업이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김태현 대표가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7년간 팀을 이끌며 만들어낸 기술과 성과는 더 이상 사운들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KB국민카드와 함께 만들어낸 협업 방식, 현업과 직접 소통하고 KPI를 정확히 터치하며 단계적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그 과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히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더 많은 기업들이 오픈이노베이션을 시도하는 지금이야말로 이 교훈이 더 필요한 시점입니다.
대부분의 오픈이노베이션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협업 방식이 잘못되어서입니다. OI담당자와만 대화하고, 추상적인 가치만 이야기하고, 현업의 KPI는 모른 채 자기 기술만 설명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사운들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비록 회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협업 방식은 여전히 배울 가치가 있는 케이스로 남아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기업과 협업을 시도하는 스타트업이라면, 혹은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고민하는 오픈이노베이터라면, 사운들리와 KB국민카드의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들리지 않는 소리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협업의 원칙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운들리 폐업 이후 김태현 대표의 여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2020년 온누리DMC에 특허권을 매각한 후, 그는 500 글로벌(구 500 스타트업스)에서 사내 기업가(EIR)로 활동하며 다음 창업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부터 직접 커뮤니티 운영을 시작했죠. 노코드 그룹, 세컨드 브레인 그룹을 거쳐, 2023년 초 작은 챗GPT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스터디가 국내 최대 AI 커뮤니티 '지피터스(GPTers)'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2023년 3월, 김태현 대표는 지니파이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창업이었죠. 사운들리에서 배운 것은 명확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고객 접점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커뮤니티로 시작했습니다.
지피터스는 "부트캠프보다 효과적이고 VOD보다 경제적인 참여형 AI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4주 과정의 '지피터스 AI 스터디'를 통해 강의 수강, 실습, 동료 피드백, 최종 발표의 전 과정을 경험하게 했죠. 특별한 점은 우수 수료생을 '선배 코치'로 양성해 다음 기수 운영에 참여시키는 선순환 구조였습니다.
"이제는 강사가 하던 전문 지식의 전달 역할은 AI가 할 수 있게 됐다. 미래의 교육은 함께 실습하고, 토론하고, 친해지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김태현 대표의 이 통찰은 정확했습니다. 지피터스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16개 기수를 거치며 5,000명 이상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35,000여 명의 회원이 약 1만 건의 AI 활용 사례를 공유했습니다. 월 방문자 수는 11만 명을 넘어섰죠.
더 놀라운 것은 수익성이었습니다. "커뮤니티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멤버십 재구매율이 30%를 넘었습니다. 커뮤니티가 자발적으로 만든 챗GPT 번역기 '프롬프트지니'는 3개월 만에 3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습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챗GPT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한 브라우저 확장 앱으로, 이용자들 사이에서 필수 앱으로 자리매김했죠.
2023년 12월, 지니파이는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매쉬업엔젤스, 베이스인베스트먼트, 네오사피엔스로부터 시드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중소벤처기업부 팁스(TIPS)에도 선정되어 총 13억 원의 재원을 마련했죠.
흥미로운 점은 투자자들의 평가였습니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의 김유정 수석심사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 사운들리 창업과 IP 매각을 통해 기술적으로는 물론 기업고객 인입 등 유의미한 성과를 올렸던 창업자의 경험을 높이 샀다. 지피터스가 커뮤니티를 넘어 생성 AI 시대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사운들리의 실패 경험이 오히려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김태현 대표는 그 경험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지피터스는 SK, 구글 같은 대기업들과 B2B 사내 AI 교육을 진행하며, B2C보다 큰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2025년 5월, 더 큰 인정이 찾아왔습니다. 구글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AI 교육을 지원하는 'AI Opportunity Fund'의 한국 파트너로 지니파이를 선정한 것입니다. 아태 전역 수십 개 지원 기관 중 한국에서는 지니파이와 어썸스쿨 단 2곳만 선정되었습니다.
이후 지니파이는 신한자산운용, 엠와이소셜컴퍼니(MYSC), 한국사회투자로부터 후속 투자도 받았습니다. 현재 13명의 팀원과 함께 새로운 비전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 비전은 명확합니다. "1-2년 뒤면 모두가 초개인화된 AI 선생님을 거의 무료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때 중요한 건 함께 실습하고, 토론하고, 친해지는 것이다." 지니파이는 이를 위해 학습자의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도와주는 'AI 실습 조교' 데스크탑 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교육 비용을 1/10로 낮춰 시장을 파괴적으로 혁신하는 것입니다.
사운들리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에서 배운 것들은 김태현 대표를 더 강한 창업가로 만들었습니다. 사운들리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평가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태현님은 사업을 성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집념이 대단했다. 남들이 표면적 정보로 비관적 입장을 보여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직접 인터뷰와 테스트를 통해 데이터를 얻어서 가설을 검증했다."
"태현님의 일하기 방식이 성공하는 스타트업을 향하는 왕도와 가장 가깝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스타트업답게 일하는 창업가다."
KB국민카드 퓨처나인에서 사운들리와 협업했던 저의 평가도 있습니다. "Tech에 대한 뛰어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당 Tech를 Biz 영역에 적용하여 다양하게 사업화했다.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최적화된 제안 제시 능력 및 해당 사업에 대한 추진과 실행력은 제가 이 생태계에서 6년 동안 만나온 수많은 스타트업 대표님들 중 감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사운들리의 폐업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었죠. 그리고 그 시작은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더 명확하고, 더 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꿈은 실패했지만, 사람들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커뮤니티로 다시 세상을 바꾸는 중입니다. 김태현 대표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김태현 대표가 KB국민카드 퓨처나인에서 보여줬던 협업 방식은 지금의 지피터스에도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현업과 직접 소통하고, KPI를 정확히 터치하며, 단계적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그 방법론. SK, 구글 같은 대기업들과의 B2B 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사운들리 시절 대기업과의 오픈이노베이션에서 배운 경험들이 지니파이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업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법, 현업 담당자와 소통하는 법, 명확한 가치를 제안하는 법. 이 모든 것이 퓨처나인에서의 협업을 통해 체득한 노하우였죠.
그의 이야기가 오픈이노베이터들에게, 스타트업 창업가들에게,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다. 제대로 배운다면, 특히 대기업과의 협업에서 배운 것들은 다음 성공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