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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바다 상어유영 Jun 25. 2020

(난임일기)아이가 온다

만 41살, 난임 이야기

나는 2019년 1월 13일에 결혼을 했다.

생체나이 40년 2개월, 우리나라 나이 42살이었다.

30살부터 각종 소개팅, 선자리에 나갔으나 매번 꽝이었고, 나이가 먹을수록 예전만 못한 남성들을 만나면서 속 편하게 혼자 살아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결혼 포기를 주저하게 만든 건, 

아이였다.

 

우리나라에선 미혼 여성이 합법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설사 아이를 가질 지라도 미혼모로 살아가는 것엔 자신이 없었다.

30대 후반부터 후크선장처럼 내 안의 생체시계가 불임을 향해 째깍째깍 가고 있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나를 조여왔다.


그러다가 운 좋게 괜찮은 사람을 만났고 내 안의 생체시계는 잠시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나를 팅커벨처럼 바라보는 남편의 사랑스러운 눈길, 심심하던 주말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어디 가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유부녀가 되었다. 


내게 결혼과 아이는 이유가 없는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숙명 같은 것이랄까? 왜 그런지 생각해보긴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아마도 나를 기른 부모님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요즈음 내 친구들을 포함해서 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그 부류는 아니었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가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하자마자 시험관 시술을 하면서 신혼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임신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나와 남편 모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문제는 내 나이. 병원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시술을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이가 생기게 하는 건 하늘의 영역이 아닌가? 6개월은 신혼을 즐기면서 자연임신이 되기를 기다리자 싶었다. 회사를 휴직하고 운동을 하면서 몸을 만들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아이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을 다니고 신혼생활을 즐기다보니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슬슬 걱정이 되어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궁경이란 걸 했다. 유착된 자궁벽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착상이 잘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해 한달을 쉬고 다음 달엔 피임약을 먹고 한 달을 쉬고 어쩌다 보니 벌써 해는 넘어갔다.

다음 해 2월부터 본격적으로 주사를 맞고 난자를 키우기 시작했다. 사춘기 이후의 여성은 매달 1개씩의 난자를 키워 배란을 시키는데, 시험관 시술에서는 여러 개의 난자가 필요하므로 호르몬을 투여해서 최대한 많은 난자를 배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시험관 시술이 여자 몸에 많은 부담을 주는 것과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바로 이 자연스럽지 않은 호르몬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험관 시술을 해본 친한 언니와 직장 동료가 있어 그 경험담을 들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채취하던 날 전신마취에서 깨고 제일 궁금했던 건 난자가 몇 개 나왔느냐였다. 이건 내 난소의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중요한 문제였다. 건강한 난자가 많이 나오면 수정시켜서 몇 개는 이식하고 나머지는 냉동해서 착상에 실패했을 경우 다음 번에 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만 35세가 넘으면 한 번에 이식할 수 있는 수정란의 수가 3개인데 나의 경우엔 3개가 채취됐다고 했다. 난소가 건강하고 젊은 경우 15개 이상도 나온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한 개라도 건강하게 자라만 준다면 개수는 중요한 게 아니다고 넘겼다.


채취된 난자는 바로 수정시켜서 3일간 병원에서 배양 후 엄마 몸으로 이식한다. 수정을 위해선 난자와 함께 정자가 있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날 시험관 시술 과정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의 역할이 있는데 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정자를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채취된 난자와 정자는 난임 병원 실험실의 어느 테이블 위에서 이름 모를 유능한 테크니션에 의해 수정된다. 지금까지 삼실할매, 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현대 과학에 의해 이렇게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채취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남편과 나는 "우리의 아이가 될지도 모르는 저 세포가 병원 실험실에 있다"고 얘기를 나눴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그렇게 별일 없이 3일이 지났고 세포분열을 통해 6세포기가 된 수정란 3개를 병원 모니터에서 확인했다. 이식 과정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떻게 내 몸으로 들어가서 어디에 놓였는지 알 수가 없다. 끝나면 조심스레 침대에 옮겨져 1시간 정도 누워서 안정을 취한다.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수술방에서 나오면서 성모 마리아께 기도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태중의 아들 예수님을 지키셨듯 제 아이도 지켜주소서"라고. 


지금까지는 병원에 날짜 맞춰서 가고 초음파로 난자 자라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식 이후는 내 몸과의 씨름이었다. 카페인이 든 커피나 음료, 스트레스와 화장실에서 힘주는 것을 포함하여 배에 힘이 들어가는 행동은 피하고 보폭은 평소보다 3분의2로 줄여서 조용히 걸었다. 내가 움직이거나 힘을 줘서 수정란이 떨어져 나갈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잘 때도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재채기가 나도 최대한 참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시험관 시술의 힘든 과정은 주사를 맞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병원에 가는 것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알수 없는 이 과정을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회원수가 제일 많은 맘카페에 가입해서 시험관 시술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을 읽으며 최대한 누워 시간을 보냈다. 카페에서는 이르면 이식 7일깨 테스터로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7일째 새벽에 일어나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며 테스터기를 해봤다. 5분이 지나도 깨끗한 한 줄을 확인하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반 포기심정으로 그로부터 3일 지나서 해본 테스터에 얇게 나온 2줄을 보고 긴가민가했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보이는 연한 2줄에 부푼 마음을 안고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했는데 임신 호르몬 수치 HCG 16.7, 이건 애매한 수치라 2일 후 다시 피검사를 해서 수치가 두배 이상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수치는 쭉쭉 올라갔다.


그렇게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침에 뭔가 흐르는 느낌이 나서 화장실에서 확인했더니 빨간 선홍색 출혈이 있었다. 황급히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고 유산 징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출혈과 함께 아기집이 흘러나왔다.


그게 내 첫 번째 유산이자 첫 번째 시험관 아기 시술 결과였다.

그날 산부인과에서 없어진 아기집을 초음파로 확인하고 의사에게 결과를 듣고 나오던 날, 병원앞에서 울컥 울음이 나왔다. 그때의 내 맘속에서 한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상실감.

그렇게 첫 번째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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