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깊은바다 상어유영 Jul 03. 2020

(고민1) 인생 궤도 재조정

나는 공무원이다. 

요즘같은 불확실한 시대에 이리 안정적인 직업이 있을까? 

7급으로 시작해서 11년차에 접어들었고 업무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별일이 없다면 조만간 5급으로 승진도 할 것이다.

그 동안 작은 아파트도 마련했고 정년퇴직을 한다면 연금도 꼬박꼬박 나올 것이고 업무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사직을 생각하고 있다.


이 직업을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큰 조직에서 다양한 업무를 접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인생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정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매진하면 언젠가는 멋있는 커리어우먼이 될 것이고 큰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니 내게 딱이다 싶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기대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점점 업무량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배우고 알아야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사실 모르는 것을 숨기고 적당히 넘길 수도 있지만 제대로 일을 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공부를 하고 그 분야에 통찰력을 길러야한다. 그와는 별개로 각종 자료 제출, 전화응대, 회의 일정잡기 같은 잡무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리는 업무 단톡방에 퇴근 이후에도 머릿속이 "ON" 상태로 있는 날이 몇 년 되었다.


이 생활이 오래되고보니 생각하는 방식, 말투, 쓰는 단어들이 업무화되고, 인간관계나 인생의 고민 마저도 업무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싱글의 삶은 그것을 더 가속화시켰다. 대개 기혼자들은 퇴근 이후 자녀 양육 등 또 다른 생활이 있지만, 싱글인 경우 특별히 열정을 쏟을 대상이 없다면 회사에 남아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싱글 직장 동료와 대화를 나누거나 운동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것이 없다. 

또 거주지가 직장이 있는 타지역이다보니 가족, 친구들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명절 연휴에나 잠깐 얼굴을 보니 그들의 중요 이벤트에서 나는 빠지기 일쑤였다. 사는게 바쁘니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그러다 40이 넘어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 늦은 나이에 한 결혼이니만큼 빨리 아이를 가져야겠다 싶었고 당시 업무가 너무 싫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바로 난임휴직을 했다. 그리고는 그렇게 바쁘던 내 인생에 갑자기 공백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7시에 눈이 떠졌다. 아침을 먹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면 오전 내내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었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고 동네 천변도 걷고 다른 사람들, 주로 내 또래의 아이엄마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켜봤다. 시간이 남으니 주로 낮잠과 요리로 시간을 보냈다. 점점 내가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 있다면 영어공부를 하고, 승진하면 써야하는 보고서도 쓰고, 뉴스를 읽으면서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고, 회의에 들어가서 내 의견을 세련되게 이야기하는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이 시간에 집에 앉아서 라디오나 듣고 밥을 하고 있다니...라는 자괴감과 불안함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나마 집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남는 게 운동이려니 싶어서 운동은 열심히 했다. 늘 생각만 했지만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던 피아노 배우기, 재봉, 꽃꽂이, 그림그리기, 고전 소설 읽기 등을 했다. 동네 아줌마로 구성된 꽃꽂이 모임에 나가서 그들이 사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줌마들이 많이 가는 식당과 까페 정보를 입수했다. 나름 재미가 있었지만 깊은 곳에 있는 불안함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 시간에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되는데...하는 생각때문이었다. 늘 복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업무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휴직하고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아빠로부터 엄마가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 엄마는 스텐트 시술을 하고 퇴원했는데 그때 이후로 부모님의 늙은 모습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동안 겪는 많은 이벤트 중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모님과의 아침 운동, 조카와의 인형놀이 같은 것들은 부모님이 건강할 때나 조카가 어린이일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밖에 나가는 기회가 줄어든 만큼 팟캐스트, 유투브를 통해 다양한 지식을 접하게 됐고, 그 기회로 지금껏 미뤄둔 글쓰기를 시작했다. 한 글자 한 문장씩 써내려가면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매초 내 것으로 할 수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시간이 내것이 아니었다. 모든 게 업무 스케줄에 맞춰서 돌아갔다. 개인의 스케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내것이 된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를 알게됐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운동하고 움직여서 시간이 내것이 된다는 것을 체험해야한다. 막연히 집에서 낮잠을 자고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 하고 싶었던 것, 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리스트를 짜고 실천해보면서 내 인생을 오롯이 내가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는 제일 중요한 문제다. 만약 내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짧은 시간만 일에 할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꼭 내가 이 일을 유지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내 앞에 떨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에 정했던 내 인생의 궤도를 중요도에 맞춰 재조정할 타이밍이 아닌가싶다. 

그동안 달려왔던 궤도가 맞는데 이리저리 바꾸기만 하다가 우주 미아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아닌가.

남은 시간 동안 아이창조와 함께 내 인생 궤도도 재조정을 통한 재창조를 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난임일기) 두번째 시험관 시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