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처음 만나는 자유(1999)
정상을 가르는 경계
수잔나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어떤 관점에서 그가 정상인지 혹은 비정상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영화상으로 봤을 땐 그 경계가 모호하다. 뼈가 없다가 갑자기 생겼다느니, 시간의 흐름이 앞뒤로 흐른다느니, 그 외에 여러 희한한 말들과 자포자기한 듯 보이는 위태로운 그의 모습이 그가 정상은 아님을 짐작게 할 뿐이다.
클레이 무어로 향하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의 말이 그런 지레짐작을 깨뜨린다. 멀쩡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기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이 무어에 도착한 그가 입원 서류를 작성하는 장면은 그가 미친 게 맞을까 하는 의심을 극대화한다. 그가 진짜로 미친 것인가, 그의 ‘멀쩡하신’ 주변이 그를 미쳤다 함부로 정의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한 것인가. 클레이 무어에서의 생활은 주변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잘못된 분류로 정상인이던 수잔나를 진짜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그런 별별 의심을 하면서 수잔나처럼, 클레이 무어의 다른 이들처럼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그들을 가두고 자유를 빼앗은 이들, 또는 그저 자유를 빼앗겼단 사실 자체에, 갇혔단 사실 자체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넌 그냥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것뿐이야. 스스로 미치도록 몰아갈 뿐. 넌 그냥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
그러다 수잔나가 깨어났다. 그때 나 또한 깨어났다. 그의 마음이 아팠던 것도 사실이고, 그 아픔이 그 자신을 미치는 방향으로 몰아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비정상 취급을 받기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다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을 보면 그의 이성은 멀쩡히 살아있었던 것 또한 맞다. 경계성 인격장애. 그는 그저 완전히 미치지도, 완전히 정상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완전히 이 방향으로도, 완전히 저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선택의 갈림길에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주저앉아버린 사람에 불과했다.
양가감정, 선택의 무게
양가감정, 반대 감정이 강력하다. 상반되는 두 행동 방침 사이에서 괴롭다.
영화가 나올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 마주한 순간이 이전에 비해선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선 더 좁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선택지의 수만 놓고 본다면 넓어진 쪽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런 많아진 선택지 사이에서 우린 매번 힘들어한다. 이게 옳은 것 같기도, 저게 옳은 것 같기도 해서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이게 답이니 이걸 선택하라고 누군가가 얘기해준다면 마음이 한결 편할 텐데. 그래서 기업이나, 국가 혹은 주변의 사람, 특히 가족이 주는 은근한 압박이 달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라면 이걸 선택할 거야, 그러니 너도 이걸 선택해.’ 그럼 난 별 고민 없이 다수에게 속하고 싶은 마음과 선택의 고민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외부가 주는 선택지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의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기관을 더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다수가 주는 답안이 늘 옳은 건 아니다. 어쩌면 대부분이 틀렸을 수도, 특히 그들의 선택이 적어도 나에겐 이로운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에게 은근한 선택의 압력을 불어넣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나를 믿는다? 나 혼자만의 경험치가 다수의 경험을 능가할 수 있을까? 다시 제자리다. 이도 저도 못하는 정체된 상태. 수잔나는 그 갈림길에서 외부에 끌려다니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완전히 믿지도 않는 애매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부의 의견도 중요하고, 나의 의견도 중요하다. 모두가 중요하니 모두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고 어느 하나도 등한시할 수 없다. 반대로 외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의심하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뭐 그 이유야 무엇이 되었던 그에게서는 유독 선택의 무게가 더 크게 와닿을 테고, 그래서 더 힘들었고, 그래서 선택하길 포기해버렸다.
자유, 나아가야 할 필요성
클레이 무어에서 만난 미친 사람들은 갇혀 있지만 자유로워 보였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밖으로 나가길 원했지만 내 눈엔 그들이 바깥사람보다 더 자유로워 보였다. 미쳤다는 타이틀의 힘으로 거리낌 없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자유, 막 행동하거나 막 말을 해대도 되는 자유, 상대가 상처받을까 걱정하지 않거나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에 충실해서 행동을 저질러 버리는 자유. 그런 그들의 무법천지가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앞서 말할 것처럼 그 속에서 자유롭기만 해 보이는 그들은 자유를 억압하고, 늘 뒷일을 생각해야 하는 통제된 사회에 속하길 원한다. 공간의 규제만이 자유를 박탈한다 생각하는 것일까? 글쎄... 그래보이진 않았다. 그보다는 미쳤다는 이유로 가능성을 지레 제한받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간 취급을 받지 않을 자유 쪽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리사’, 자유를 위해 매번 탈출을 시도하면서도 다시 클레이 무어로 발길을 돌리는 그를 보면 그에 따르는 책임,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던 듯하다. ‘정착’, 리사는 자유를 원하지만, 심적으로는 클레이 무어에 귀속되어 그곳에서만 숨 쉴 수 있고, 그곳에서만 안정될 수 있으며, 그곳에서만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곳에 안착해버린, 가능성이 정말로 제한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따라가다 보면 클레이 무어에 정착한 삶이, 가능성을 클레이 무어의 크기에 맞춰버린 삶이, 현실 사회에서 받을 모든 자극이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워진 삶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할 순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리사의 결말을 보고 있자니 처음 만났던 택시 기사가 떠오른다. 클레이 무어에 너무 정 붙이지 말라던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