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적이라 말한 건 영화가 레바논 내전을 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총, 피, 군인, 불, 죽음, 날 선 감정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들을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우린 여전히 두려움을 느낄까? 그건 영화가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즉, 내가 이 영화를 위협적이라 느낀 주된 이유가 그 속에 담긴 상황 때문이었다기 보단 이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영화는 영상도, 자막도, 음향도 위협적이다. 자막은 아주 전투적으로 등장한다. 피사체를 한껏 가깝게 잡은 카메라는 조금만 움직여도 영상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그 속도만큼 긴장감이 돈다. 그리고 낮게 웅웅대는 소리, 빠른 듯 빠르지 않은 템포. 이 영화는 그렇게 내전이란 위협적인 상황에,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위협적인 효과들을 가미했다. 위협에 위협을 얹은 격이다.
반전영화에 대해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범한다는 내용은 초면이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흔히 반전영화라는 요소에만 주목했다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이 주는 재미에 주목했다면 그 영화는 반전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야만 반전영화로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반전이란 요소는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쓰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선 이 영화의 반전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길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으니.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반전영화로서 아주 성공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반전의 진부함을 논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화가 심리적인 긴장감을 잘 다뤘고 편집도 대단했다. 영화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이후 마주하게 되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이 설령 우리가 익숙한 이야기와 닮아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반전 영화가 아니다. 침묵을, 그 깨짐을,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겠단 약속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전을 이용한 것일 뿐. 반전이 영화에서 주는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을린 이야기의 시작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녀가 난민 청년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아부 타렉이 니하드임을 안 순간부터? 아니면 그녀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쥐여준 순간부터?
나왈은 편지에서 이야기의 시작에 대해 언급한다. 첫인상은 중요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시작 또한 중요하다. 그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부터가 작가의 관심, 감정이 담기기 때문이다.
잔뜩 그을린 그녀의 이야기는 적어도 내 눈엔 비극적이다. 운명은 그녀 앞에선 한없이 잔혹하게 굴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비치는 나왈의 삶이 아무리 비극적이었다 해도 무조건 그녀의 삶을 안타까워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녀 말대로 이야기는 어디서도 출발할 수 있고, 그 출발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그녀의 삶은 다르게 담기기 때문이다.
나왈, 그녀의 적은 누구인가
적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과연 개인에게 있어 적은 누구인지, 무작정 내가 속한 집단의 적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적을 만들고 나의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는지를.
나왈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적이란 존재가 정말로 필요했을까. 물론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나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나의 적이 될 것이고, 그들과 충돌하는 일도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왈은 그녀가 속해있는 집단의 적인 난민을 적으로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레바논이란 집단이 지키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지키고자 하는 듯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사랑한 난민 청년, 와합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고 목격한 상황의 불합리함에 분노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에 따라 집단의 적의 편에 섰다. 그래서 그녀는 레바논 사람들의 적이 되었다.
우린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각자 집단의 뜻에 따른다. 내 집단의 적은 자연스레 나의 적이 되기도 한다. 내 집단이 적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욕을 더 던지고, 그들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워진 도덕적 잣대로 그들을 죽어도 되는 인간으로 취급한다. 적이란 나에게 없는 분노도 들끓게 하고 나에게 어떤 말과 행동도 허용케 한다. 그런 존재를 우린 너무나 쉽게 얻을 수 있다. 집단은 그런 힘이 있다. 그렇게 우린 실제 나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존재할 필요도 없었던 적을 가슴 한편에 모셔두고 분노하고 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이성도, 객관적인 판단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분노에만 휩싸일 수 있다. 왜 분노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