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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27. 2024

시네마 천국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1988)


영화 같은 삶, 영화를 통해 떠올리는 과거와 영화를 통해 느끼는 현재


우린 가끔 ‘영화 같은 삶’ 이란 표현을 쓴다. 나는 종종 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곤 한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영화를 접했다. 내 기억 속엔 평생을 잊지 못할 영화도 있고, 금세 잊혀버린 영화도 있다. 또 저게 말이 되나 싶은 영화도, 너무나 현실적인 영화도 있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은 것도, 새겨짐 없이 잔상만 남은 것도 있다.


내게 어떻게 다가왔든 그 모든 영화는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일인 양 실제 나의 경험들과 함께 기억 저편에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인지 단어, 인물, 환경 등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개념, 그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들은 당시에 봤던 영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내 초등학교 시절 마법의 세계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2002>, 시골 선생님은 모두 <선생 김봉두, 2003>'으로 통했다. 악마의 이미지와 신부님의 역할은 (정확히 몇 편인지는 모르겠는데) <엑소시스트>로 각인되어버렸고, 개미들은 <벅스 라이프, 1998>에 의해 착한 곤충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피아니스트의 전설, 1998>로 피아노와 배라는 다소 연관성 없어 보이는 두 단어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한 하나의 조합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많은 영화가 실제 내 삶에 개입해있다.


영화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이 순간을 영화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맞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림으로써 만들어진 비현실성이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무한한 감각보다 더 풍부한 느낌으로 채워질 때가 많다. 현재의 감각은 이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지난날의 기억과 뒤엉켜 저장된다. 만약 그 순간에 떠올린 기억이 영화라면 강렬한 느낌이 들 것이다. 영화는 애초에 강렬했고 시간의 흐름에 의해 퇴색되어도 지금의 일상보단 강렬하니까. 그런 강렬함을 지닌 기억은 여러 가지의 감정들을 동반한다. 그래서 영화와 함께 기억될 이 순간이 더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같은 영화


반대로 인생과 같은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이 말을 꺼내는 주된 이유는 러닝타임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좋았다. 처음엔 몰랐지만 엔딩씬을 보고 나서야 좋은 영화, 기억에 남을 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보는 동안에는 이게 다 뭔 소리인가 싶었다. 지난번 <하나 그리고 둘, 2000> 때도 아쉬웠던 점이 러닝타임이었다. 어떤 친구들의 말처럼 실제 우리의 삶 같아서 좋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영화는 현실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같을 수도 없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의도로, 어떤 하나의 의미 또는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고 정리정돈 돼 있다. 물론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선 특히나 러닝타임이 긴 영화일수록 정돈이 필요하다.


앞서 영화가 강렬하다고 언급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금은 의미 측면에서만 말하겠다. 나에게 있어 영화와 인생의 차이는 길이와 편집에 있다. 인생은 아주 길다. 우리는 마주하는 시간의 길이가 길수록 초점을 잃기 쉽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길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도 이 길로 가야 할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다 해도 이는 잠시뿐. 또다시 이어지는 시간 아래 이전의 답이 의미를 잃는다. 명확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에 비해 영화는 아주 짧다. 그리고 영화는 잘 만들어졌다는 가정하에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잘 닦여져 있는 길을 따라 나온다. 이를 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요소들만 집중적으로 담아내거나 집중이 필요한 요소에만 강한 인상이 남게끔 표현한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3시간. 물론 우리의 삶에 비해선 길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길을 잃기 쉬운 시간이다. 잠자코 보고만 있기엔 굉장히 긴 시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가 지표로 있긴 했다. 그런데 중간에 이어진 엘레나 이야긴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이 내용이 불필요했단 건 아니다. ‘영화와 관련된 토토의 삶’을 중심으로 두면 이 장면이 영화보다 사랑을 택하게 되는 토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이해하는데 엔딩씬까지 가야했고, 엔딩씬은 이 장면으로부터 멀었고, 엔딩씬을 보고 나서도 이해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영화면 장면들의 의미를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환 잔잔하고 느리게 전개되는 영화다. 그렇기에 큰 흐름에 맞게 보다 잘 정돈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어느 정도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간결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영화감상 후에도 영화이해에 꼭 필요한 필수적 장면이 관객의 머릿속에 남게 함으로써 바로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새겨볼 수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파고, 1996>도 엔딩씬까지 보고 나서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 영화와 비교해보자면 파고는 앞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씬들이 많았다. 그래서 감상이 끝나자마자 뭐지 하는 의문과 동시에 엔딩씬과 바로 직전 씬에서의 대사를 기반으로 이전의 장면들이 단번에 모여서 나를 이해시킨다. 그만큼 그 마지막 대사를 위해 깔아놓은 장면들이 너무나 강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인지 생각에 더 많은 자발적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물론 이 영화에서의 표현방법이 더 인간적일 수는 있지만, 영화라면 조금은 더 명확히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주와 기사이야기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공주와 기사 이야길 한다. 기사는 공주를 기다리다 99일째 되던 날 밤 자리를 떠난다. 하루 뒤면 꿈에 그리던 공주와의 결혼이었으나 그는 떠나버린다. 그렇게 공주를 향한 오랜 기다림은 끝이 난다. 토토는 엘레나와의 이별 후에 이 이야기 속 기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공주가 결혼해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 알프레도는 이 이야길 건넬 때 본인은 기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자기는 모르겠으니 토토 네가 알게 되면 알려 달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는 정말 몰랐을까? 그는 엘레나가 찾아왔었단 사실과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모두 묻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가 이미 기사의 마음을 이해했으며 그런 기사의 마음을 통해 토토에게 사랑의 부질없음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뜻이었든 아니든 토토는 결국 영화계의 거장이 된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영화였다. 그에게 영화는 인생을 함께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알프레도 또한 영화를 사랑했다. 그도 어린 시절부터 줄곧 영화와 함께했다. 그래서 영화 밖의 삶을 살려고 하는 듯한 토토를 사랑 밖으로 끌어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알프레도는 있는 그대로의 토토가 아닌 영화를 사랑하는 토토를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공주와 기사 이야기도 엘레나와 토토를 향한 말이 아닌, 토토와 알프레도를 향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림과 꿈과 믿음과 의심. 알프레도가 영화에 대한 토토의 마음을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렸다면 영화계의 거장이 된 토토와 함께하는 꿈이 이루어졌을 텐데. 그러나 그는 결국 영화를 향한 토토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영원한 기다림 속에 머무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진실한 꿈은 기다림 속(사랑)에 있는 것이 아닌 이를 박차고 떠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것(영화)이었다. 기사의 떠남이 기다림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닌 오히려 더욱더 깊고 영원한 기다림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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