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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25. 2024

카모메 식당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2006)


고요함과 평화에 감춰진 것


카모메 식당은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마주함에도 느긋하고 잔잔하기만 하다. 느긋한 전개,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 심지어 영화의 배경이 필란드라는 사실까지 고요와 평화를 넘어 단조로움을 물씬 풍긴다. 일반적으로 단조로움은 재미가 없다. 가끔은 단조로운 구성이 숨 막히게 해 보기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재미없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왜냐하면 사실 이 영화는 단조롭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으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생기발랄하다.


영화에서 예로든 숲으로 이야길 이어가 보자. 숲은 평화, 고요, 잔잔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지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을 때 찾기 적절한 곳이다. 그러함에도 숲은 심심한 곳도, 숨 막히는 곳도 아니다. 이는 내 시야에 담기는 장면과 다채로운 음향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숲엔 그냥 초록색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다양한 초록색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양한 생물들이 내는 소리, 나무와 돌멩이들의 배치, 여러 종류의 동식물들. 숲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것들이 한 데 뒤섞여 마치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굴기에 평화롭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린 은연중에 느낀다. 눈치채지 못한 복잡함이 우리의 지루함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약간은 익살스럽게 자리한 심리적 긴장감, 화면구성, 요리할 때 나는 소리, 배경음악, 너무 느리지만은 않은 화면 전환 속도, 색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인물의 등장과 이들이 저마다 안고 온 각자의 색깔들이 카모메 식당에 하나씩 쌓여서 알게 모르게 다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모든 요소가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색채처럼 굴기 때문에 표면적인 분위기인 ‘단조로움’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음을 당신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감각은 당신이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이 영화의 숨겨진 복잡함을 찾아낸 것이다.



단골손님


단골은 쉬이 얻어지지 않는다. 어떤 특별함이 손님을 이곳으로 이끌 때 비로소 그들은 단골이 된다(물론 단골을 만들기 위해선 다른 요소도 필요할 테지만). 처음 카모메 식당은 손님이 없었다. 이는 그곳만의 특별한 매력 포인트가 발생하기 전이었다. 사실 나도 초반엔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이 식당의 진가가 발현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사람들이 이곳을 하나둘씩 찾고부터다.


카모메 식당은 사치에를 닮았다. 닮았단 게 공간 그 자체라기보단 그 공간의 분위기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처음엔 그저 쑥쑥 한 이방인의 느낌이 강했다. 네모진 공간과 텅 빈 테이블 그리고 그 속에 홀로 존재하는 사치에. 거리로 난 식당의 유리가 탁 트인 느낌을 줄 법도 한데 여기선 오히려 그녀와 식당 밖의 사람들 사이에 오묘한 단절을 만들어낸다. 유리 안에는 낯선 사람이 홀로 덩그러니 존재하는 부담스럽고도 이질적인 공간이 보인다. 그러다 사치에는 이 유리벽 너머로 한 명, 두 명 사람을 들인다. 그들은 처음엔 커피만 마신다. 그러다 시나몬 빵을 찾고, 나중엔 일본의 소울푸드인 오니기리까지. 그들은 점점 친밀해진다. 그렇게 그녀의 공간은 사람으로 채워지고 덕분에 우린 그녀의 훌륭한 인사를 점점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더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친밀하고 친숙한, 인사를 훌륭하게 하는 나의 이웃이다.


카모메 식당의 단골은 그녀의 다가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을 기점으로 사치에도, 그녀의 손님들도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을 연다는 게 자칫 잘못 보면 사치에에게 모두가 동화됨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동화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여짐이다. 네가 너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 식당 안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의미와 그들이 가지는 존재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게 된다. 더는 사치에도, 그녀의 식당을 찾은 이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딱딱하고 안 봐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다. 이 집의 단골은 사치에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번 이곳에 발들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제 이 공간은 그녀만의 공간이 아닌 모두의 공간이란 것을. 이 집의 단골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여유가 줄 수 있는 것


분위기 덕분인지 영화를 보고 나니 여유로움에 생각이 노곤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읽기 시작한 책이 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소재는 아니지만 마지못해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반감과는 다르게 좋았다. ‘여행’. 종종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모험을 일삼던 내가 그런 활동과는 다른 방향으로의 모험을 추구하고 싶어 함을 깨닫고부터는 여행으로 향한 마음이 끊겼다. 그러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관심이 가지 않게 됐다. 그러다 이 여행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난 이 책에 묘한 끌림을 받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여행에 다시 관심이 돌아간 게 아니라 이 책이 보여주는 현실의 맞은편에 자리한 여유에 끌렸다는 것을. 여유...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순간 여유로움을 느꼈다는 것은 이들을 마주하기 이전에 내가 상대적으로 여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무엇이 날 그리 옥죄었던 것일까.


난 무엇에 이리 쫓기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그리 멀리 가지도 않는다. 이는 지난날 극심한 낙관주의자였던 나와의 비교를 통해서 바로 찾을 수 있다. 이런저런 원인을 다 갖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유난히 뜨끔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나이’다. 이 나이 땐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정도는 벌어놔야 하고, 이때까진 이런 것들이 준비되어있어야 하는데... 최근 나의 활동내용을 정리하면서 가슴 아픈 현실을 발견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활동내용들. 나 스스로 다른 평균적인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나의 목표를 정한다. 뭔가 이 시기가 지나면 지금의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 더 어린 시절, 철없고 그저 도전정신만 강했던 그 날의 내가 했었던 모든 것들을 지금은 하면 안 될 것만 같다. 누가 내게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지레 제 발이 저리고 만다. 전 같으면 하지도 않을 망설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유는 그런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굴레를 내려놓게 한다. ‘이때까지 이것을 꼭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실 그런 압박이 내게 득보단 실이 됨을 알면서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또 스스로 그 굴레를 목에 감는다.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나부터 그런 성향도 아니기에 누군가에게 이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가끔 정도는 여유를 찾아볼 필요가 있음은 확실히 인정한다. 특히 이런 불필요한 압박에 뒤 감겨있을 때 여유로운 사고는 아주 필요하다.



덤덤하게 마주하는 아픔


덤덤함이란 참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덤덤하다. 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영화를 봤는데 뭔가 덤덤하다. 그 영화가 내게 어떠한 감흥도, 흥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픔에 대해 덤덤하다. 그 아픔이 내게 어떤 영향력도 주지 않으며,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또는 그러길 바란다). 덤덤함은 마주한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내가 동요하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래서 따뜻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하다.


사치에는 덤덤한 사람이다. 살가운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아픔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무던히, 그러려니 넘긴다. 사치에와 아픔을 겪은 사람 사이엔 음식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 흔한 격한 공감도, 위로의 말도 없다. 그저 사치에가 만든 커피가, 시나몬 빵이, 술이, 오니기리만 놓여있다. 그 이상한 거리감. 그녀 앞의 사람들은 그것들로부터 활력을 되찾는다. 사실 누군가를 향한 위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지나치게 자기 소모적이다.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 건네는 적당한 위로. 그 적당한 선이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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