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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22. 202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잔혹동화: 한 사람의 비극에 대하여


마츠코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갔다. 맑고 낭랑하던 노랫소리는 오 간에 없고 그녀에게만 유독 냉혹한 현실만이 그녀 곁에 남았다. 행복을 기대하는 이의 삶을 비극으로 끌고 가긴 생각보다 쉽단 생각이 든다. 밝으려 노력해도 주변 상황은 자꾸만 나빠져 간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2014>도 한 잔혹함 하는 영화이다. 마츠코도, 성실한 앨리스 수남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 속에서 자꾸만 무너져간다. 둘의 비참함은 비슷하다. 그러나 유난히 마츠코가 더 아프게 다가온 건 동화같이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그녀에게 그런 것은 그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듯 눈앞에서 산산조각내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앨리스의 삶은 외면하고 싶어지지만, 마츠코의 삶은 이상하게 자꾸만 뒤 돌아보게 만든다. 두 작품 모두 비극이 목을 조르는 형태는 같지만, 그 대상은 달랐다. 앨리스는 현실이, 마츠코는 사랑이 고달팠다. 난 질 것 같은 싸움은 피하는 편이다. 비겁해 보이긴 하지만 그간 그리 나를 지켜왔다. 영화가 보여주는 비극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앨리스의 비극은 내가 이길 수 없을 것 같기에 외면을, 마츠코의 비극은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기에 선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극이란 것이 남들 눈엔 별거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난 이리 처참히 찢기고 있는데 누군가의 눈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어떤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니. 우린 고통받는 순간에 타인의 도움을 바라게 된다. 하지만 도움을 갈망하는 나의 마음을 타인은 잘 모른다. 그런 현실이 영화에서도 보이는 것 같아 더 씁쓸해진다.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


'인간의 가치라는 건 뭘 받았느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뭘 해줄 수 있는가이다.'


마츠코의 삶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리고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봤다. 주기만 하는 것. 나로선 감히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남들 보여주기 좋을 만큼만 주는 것이 나의 삶이다. 그런 내겐 배려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누군가와의 함께는 참으로 번거롭고 불편한 마음만 들게 한다.


그래서인지 마츠코와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면 부담스럽고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다. 난 주는 게 편하지 않으니 받는 것도 불편하고, 그런 불편마저 겪고 싶지 않을 땐 그 이상의 보답을 해야 하는데 주고 싶지 않은 만큼 부담이 뒤따른다. 어쩔 땐 저리 다 퍼주고 나면 자신에겐 무엇이 남나 하는 괜한 걱정도 든다.


난 내가 돌려받지 못함으로써 받을 억울함에 스스로가 못난 모습을 보일까 두렵다. 그래서 집착수준으로 선부터 긋게 된다. 난 이게 인간의 본 모습이라 믿는다. 준 만큼 받고 싶어 하는 것. 그래서 진심으로 주고만 싶어서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억울하지 않으냐고. 그리고 억울한 마음이 드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지 않으냐고.



기대감 속에서 자라난 오늘의 나는


어릴 적엔 정말 뭐든 할 수 있었다. 기억을 온전히 거슬러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수도 있었고, 철봉 매달려 거꾸로 돌기도, 바위 위를 재빠르게 뛰넘기도, 중심 잡고 빨리 달리기도, 벌레 많이 잡기도, 벽 타고 넘기도, 시 짓기도, 만들기도, 공부도 다 자신 있었다. 난 그저 하고 싶단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자라면서 크고 작은 실패를 맛봤다. 나보다 뛰어난 아이들도 많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무궁무진하던 나의 재능은 현실이란 제약에 의해 빠른 속도로 추려졌다. 아직도 어릴 적 그 가슴 벅찬 기대감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계획하고 뛰어다니던 내가 생생히 떠오르는데 지금의 난 한껏 움츠린 채 몸 사리는 겁쟁이가 되었다.


시간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나이가 주는 압박과 그 나이에 어울리는 주변의 시선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보다. 나의 기대가 크든 작든 무너져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내가 그만큼 깎여나간다. 그리고 점차 잘한다 잘한다 하는 것에만 목을 매게 된다. 저것만이 나에게 남아있는 동아줄인 양 그리 매달린다. 스스로 채워지던 자신감은 타인에게 양도되어 그들의 잘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려 그리 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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