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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29. 2024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토머스 얀 감독의 노킹 온 헤븐스 도어(1997)


무엇이 웃을 수 있게 만드는가


블랙코미디는 희극 안에 비극을 담아낸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두려움을 희극으로 만들어버렸다. 진정한 희극이었다. 이는 애초에 존재하던 삶의 무게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만큼 강력했다.


지난번에 <쓰리빌보드, 2017>을 봤다. 블랙코미디라서, ‘코미디’라서 재밌을 줄 알았다.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거기엔 내가 원한 속 시원한 웃음은 없었다. 내게는 ‘코미디’보다 ‘블랙’에 더 가까웠다. 웃으라고 만들었지만, 그 안에 담긴 뼈가 더 크게 느껴져서 제대로 된 웃음을 터뜨리지 못한 것이다. 마지못해 웃긴 했지만 그건 그 상황에서 웃지 않으면 더 씁쓸해질 듯해서 나온 웃음. 솔직히 영화가 너무 현실적이었다. 코미디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내용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내게 진짜 웃음을 선사했다. 일단 감독은 다 죽어가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건·사고를 통해 저들을 불쌍한 사람이라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안타까움을 느낄라치면 금세 분위기가 전환되어버리니 동정심을 느낄 짬이 없다. 감정을 농락당한다는 불쾌감도 없다. 애당초 죽음을 코앞에 둔,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들이다. 설령 지금, 이 순간에 누구 하나 죽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기에 안타까움도 없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악당은 갱단이다. 이들 또한 죽음을 가까운 곳에 둔 인물들이다. 그러한 이들이 죽을 뻔한 위기들로 도배된 신들을 거쳐 가기에 우린 이들의 죽음에 더욱 초연해질 수밖에 없다. 죽어도 그만, 안 죽어도 그만. 이들에겐 그저 아쉬울 것 없는 인생이다. 그런 편안함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어지는 비현실적인 장면들 속에서 나의 ‘진짜 웃음’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부족함?


보통 개연성이나 현실성이 부족하면 영화도 부족하다 느끼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반대로 알찼다. 일단 이 영화는 죽음 앞에 두려울 것 없는 두 시한부의 여행이란 굉장히 식상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어지는 상황들은 더 가관이다. 갱단의 차를 훔쳐 타고 돈을 손쉽게 훔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정말 삼류 중의 삼류라고 느낄 법한 개연성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전혀 싸구려 같지 않았다. 그만큼 감독이 영화 내에 들인 노력이 컸다.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부족한 개연성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 넣었다. 플롯 구성이나 화면 전환 방식 등을 통해서! 그래서 현실에 놓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엔 이해가 되었다. 생각보다 꼼꼼한 영화였다. 그래서 세련된 느낌도 받을 수 있었고.



악을 이리도 선하게 다룰 수 있을까


선과 악, 이는 우리가 아주 지겹도록 마주한 주제이다. 이 주제를 대할 때면 늘 분위기는 진지해지고 결국엔 답 없는 답으로 결론을 맺는다(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다들 집엔 돌아가야 했기에).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 비치는 악은 어딘가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순수했다. 보면서 저 사람들 진짜로 나쁜 짓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만큼 별 감흥 없는 나쁜 짓이었다.


술김에 바다를 한번 보겠다고 차 훔쳐서 병원 탈출하기, 새 옷 사려고 은행 털기, 그 와중에 CCTV 보면서 약 올리기, 아이에게 피우던 시가 건네기, 탈출을 위해 경찰 속여먹기 등 그들의 악랄한 행동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그저 까칠한 친구와 순해 빠진 친구였는데 갈수록 갱다워 진다(물론 여기엔 편집의 효과도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행크와 압둘도 갱이라고 말은 하지만 여기선 그저 덤앤덤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모두가 진짜 악의 축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앞서 말했던 코미디적 요소에 있다. 일단 마틴과 루디는 악의가 없다. 루디의 경우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며 마틴을 말린다. 마틴은 그냥 별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즐거운 바다 여행을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할 뿐이다. 행위에 악의가 없다 하여 이들이 나쁜 놈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영화라고 해도 저들의 행위가 옳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현실성이란 개그를 더하면 이야긴 달라진다. 우선 비현실성이 우리에게 ‘저건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사고를 확실히 심어준다. 그런 다음 인물들의 비윤리적 행위로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우리의 뇌는 잠시 도의적 사고를 멈추고 저들의 바보 같은 행위를 그저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악을 가리기 위한 완벽한 뇌 속임이다!



천국의 문 뒤에서 만나게 될 나의 바다


천국의 입구에서 우리의 지난 인생이 결정된다. 바다를 봤던 사람과 그러지 못했던 사람으로. 굉장히 신박한 구별법인 데다 알려준 이가 마틴이라서 더 폭소했다. 그 와중에 묘사는 또 어찌나 달콤하게 하는지 대사가 주인을 잘못 찾아간 게 아닌가 싶어서 당황하기도 했다.


아무튼 천국에 바다를 얹어서 해보기 처음이었다. 내게 바다는 정말 특별할 것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유의 비린내, 끈적거림, 사람들로 그득한 숨 막히는 공간, 계속해서 엉겨 붙는 모레의 질척거림, 운이 나쁘면 그곳에서 닭 뼈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바다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 것 같다

.

이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다에 대한 인식.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불편한 곳이란 인식에 가려져 있던 바다에 대한 환상이 비집고 올라온 것이다. 미지의 공간, 투명함에도 속내를 알기 어려운 곳. 단순하게 생겼지만, 세상 어려운 곳이며, 접근하기 쉬운 듯하지만 세상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바다, 그곳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리고 인간은 미지의 영역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한 동경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다는 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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