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2014)
숨막히는
감독마다, 영화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롱테이크 기법에서 기대하는 효과는 촬영의 대상에 관객이 더 잘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번의 긴 숨을 쉰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부가 아닌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하나의 카메라로 이어진다(사실 그런 기술의 신기함에 관심이 뺏겨 영화감상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물론 중간중간 교묘히 끊었겠지만 그래도 관객의 눈에는 연속되는 시간 아래 하나의 긴 사건만 보인다. 한 번의 숨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빠른 템포로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 숨소리도 들릴 듯 가까워진 카메라 속 대상과의 거리, 높은 곳에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감정선. 이 모든 것들이 더 숨통을 조여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숨 막히면서 우스운 영화.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무대에선 뭐든 할 수 있는 자와 무대에서 망신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
무대에선 뭐든 할 수 있는 자와 무대에서 망신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자, 마이크와 리건. 실제 무대 위에선, 더 나아가 현실에선 (둘 다 실력이 출중하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감 넘치는 자가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의 능력에만 집중했기 때문이겠지. 사람은 굉장히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특정 능력만으로 이들의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다양한 모습을 놓치기 쉽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리건이다. 현실에서 더 빛날 수 있는 마이크가 아닌, 퇴물 배우 리건. 그러고 보면 영화, 연극, 책 등 연출, 각색이 가능한 모든 것들의 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 삶에선 빛나지 못한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들을 향했던 1차원적 평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심어주는, 그런 다양함을 낳는 힘!
인정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이
어릴 땐 특히나 나 자신이 못나 보이는 몇 가지 순간이 있었다. 앞에선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뒤에서 꽁해진 나, 질투심이 폭발하여 결국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나 그리고 타인의 관심, 인정을 받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나. 다른 건 다 극복하였지만(그럴 것이라고 간절히 믿는다) 끝내 성장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물론 그 정도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풀이 죽어버리는, 우울해져 버리는 나. 아직도 어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나의 모습.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함을 안다. 타인의 의견은 나에겐 그저 들러리일 뿐이다. 그렇게 수만 번 최면을 걸어봐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타인의 눈. 아직 최면이 부족한 것인가. 자꾸 나이만 먹지 말고 정신도 함께 어른이 되어가면 좋겠다.
근심, 걱정의 덧없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참 의미 없다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근심과 걱정'이다. 돌이켜보면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는데 괜히 겁먹느라, 겁먹어야 할 리스트를 만들어내느라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적이 많다. 아직도 친구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그땐 자신감이 넘쳤고, 시간 여유가 있었고,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정말 몰랐고, 그래서 난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해버렸고.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친구가 다시 돌아온다면 꼭 이 말을 하고 싶다.
"너의 말이 맞더라. 그땐 공감하지 못했다. 안전을 위해 걱정이라는 것도 물론 필요는 하지만 적당히, 좀 많이 적게 하고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걱정만 하고 안전만 기하다 많은 시간을 날린 내 모습을 보며 느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갈 용기가 더 중요하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