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1999)
친절한 영화
처음 봤을 땐 작은 것에 집중하느라 이 영화가 줄 수 있는 매력 대부분을 놓쳤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놓고 보여줬는데도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결국엔 제대로 된 이해를 못 하고 말았다. 영화 전반을 이해하고 나서야 이전에 그리 집착했던 세부적인 것들의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숲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영화들이 있다. 내부의 작은 요소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그런 영화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 영화가 그렇게 편하고 마음에 든다. 알아서 다 이해시켜주니 머리 아플 일이 없다. 그렇다고 오해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친절함이 나를 멍청하게 만들거나 수준을 떨어뜨리거나 하진 않으니. 오히려 오해의 여지를 줄임으로써 영화에 더욱 집중하게 했고 명확함과 친절함이 예술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으나 이는 영화 내의 디테일로 채워졌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
이렇게 배우 모두가 매력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의 주인공은 레스터다. 그는 영화 속 인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멋들어진 말을 가장 길게, 자주 한다. 그런데도 나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제인, 그녀를 시작으로 이후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렇게 다들 색다르고 독특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들이 보여주는 결여!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나 화려해서 절로 눈이 간다.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보면 반사적으로 아름답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끝이다. 말과 동시에 끝나버리는 아름다움이다. 마치 말을 내뱉는 순간 나의 미적 감각은 제 역할을 다한 듯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 버린다. 그러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어떤 것,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이들에겐 그런 반사적인 말은 튀어나오진 않지만, 자꾸만 시선이 쏠린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다소 병적이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예전에 “동정심, 연민”에 대해 얘길 한 적이 있다. 난 이곳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 부족하지만, 그 빈자리 때문에 내 시선이 머물고 그런 나의 관심이 결국 그들을 미화시킨다. 물론 이러한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다른 요소들도 필요하지만, 여기에선 말을 아끼겠다.
불행의 시작과 끝
레스터는 샤워-자위-무기력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 무기력은 두 모녀가 그를 패배자로 여김에서 온다. 무능한 레스터, 그는 결국 그렇게 갈망하던 안젤라의 관심을 받게 된 후 미소로 엔딩을 장식한다. 안젤라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많은 남자의 시선을 받는다고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잔뜩 자신을 추켜세우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레스터뿐이다. 남들의 관심을 받길 원하지만 충족되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자극적인 말로 타인과 자신을 속인다. 그랬던 그녀는 레스터에게 진정한 관심과 존중을 받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꾸밈없는,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제인은 리키의 아름답단 말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리키는 자신을 사랑하는 제인에 의해 그들이 직면했던 불행을 종결짓는다.
그러나 약해진 자신을 다그치기만 하는 캐롤린, 사실은 동성애자지만 그런 자신을 부정하는(아마 외부로부터도 부정당했을 거라 짐작된다) 리키의 아빠, 경직된 가정에서 숨죽이고 있는 리키의 엄마 이들은 결국 치유되지 못한 상태로 엔딩을 맞는다.
우리가 나 자신만으로 완벽하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런 큰 불행의 시작도, 불행의 치유 이후 느끼게 되는 거대한 행복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 혼자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감정은 외부의 존재에게서 올 때가 많다. 이로 인한 감정은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불행 또한 혼자서 시작하기도, 혼자서 끝을 맺기도 어렵다. 내가 나에게 행사할 힘보다 나의 밖에서 나에게 가하는 힘이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린 밖의 것으로부터 쉽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