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J. 파큘라 감독의 소피의 선택(1982)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기대
(지금부터 이을 말은 다소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난 처음 소피를 봤을 때 욕망의 자유를 분출하는 여인을 그렸다. <글루미 선데이, 1999>의 일로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의 프란체스카 같은 그런 매력적인 여인. 그러다 그녀에게 있었던 사건 하나를 알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그녀가 나치로부터 잔인하게 짓밟힌 피해자이길 바랐다. 그녀가 그 안에서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나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온 세상에 까발려주길 바랐다. 하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아 배반당했다. 더는 그녀에게서 내가 기대했던 피해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알게 된 후 연민의 마음이 걷혔다. 이젠 그녀와 네이든의 관계도 달리 보인다. 소피, 그녀는 이제 내게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죗값을 치르고 있는 죄인이 되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내 멋대로 매력적인 여인이길 바라고 잔혹한 폭력의 피해자이길 기대하고 결국은 그녀가 고통받아도 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사람은 상상력이 참 풍부하다. 하나를 보고 열 가지를 상상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란 자신의 세계에 고립되어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외부와 원활히 소통한다 해도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내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그 사람을 뜯어보고 재조립하고 감정을 실어보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여태 그래왔듯 또다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고 예측하고 또 실망하는 상황을 반복할 것이다. 실망의 원인에 그 사람이 아닌 멋대로 규정짓고 판단하고 기대한 나를 둔다면 이 이상스러운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으려나.
사랑의 조건, 소피의 선택
나는 한때 사랑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내게 부족한 것을 다른 이를 통해 채우는 아주 생산적인 활동. 그러나 세상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득이 될 그런 선택을 마다하고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이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소피는 결국 스팅고가 아닌 네이든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소피의 선택은 그저 누군가로부터 맹렬히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또는 아우슈비츠에선 살고자 하였으나 안전한 삶 속에선 오히려 죽고자 했던 것과 같은 마음 때문이거나 또는 그녀를 짓누르고 있던 그간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또는 여느 평범한 사랑이 그렇듯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적절한 이성이 주는 매력에서 시작되어 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마음에 의해 행해진 것이거나. 그 시작이 어떻든 그녀는 네이든이라는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파괴적인 사랑을 보고 있자니 그 대단하다 칭송받는 사랑이란 것도 숭고한 가치를 가지진 않구나 싶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마침표에서 발견한 인간성
침대 위, 희망찬 아침 햇살 아래 두 사람이 누워있다. 한 명의 미치광이와 한 명의 죄인. 그들 곁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이 놓여있다. 그들은 이 시가 장식하는 엔딩 속에서 아침 햇살의 심판을 받으며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있다. 참으로 절묘하게 아름다운 숙면이자 마침표이다. 이제 이들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도, 관객들의 뇌리에도 깊숙이 박혀 아름다운 죽음의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솔직히 난 이들의 죽음을 보고 안심했다. 이 엔딩은 그리 서로가 고통받으며 살 바에야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나을 수 있겠단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시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모습에 이들의 고통을 이제 더는 함께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와중에도 나부터 챙기는 마음에 내가 참 인간적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