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2006)
잔혹함과 동화
신비롭거나 아름답거나 해피엔딩이거나 순수하거나. 동화라서 기대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곤 잔혹함뿐이다. 이곳의 잔혹함은 손끝에 박힌 가시와도 같다. 꺼림칙하지만 빼내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온 신경의 날이 선다. 첨예해진 감각은 무뎌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온 신경을 곤두세운, 한껏 긴장한 상태로 봐서 그런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런데도 보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근원을 알 수 없는 끈기의 힘으로 한 번에 영화를 다 보긴 했는데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맑고 깨끗해진 것이 아닌 속이 허해진 기분이다. 씁쓸하니 마음이 아프다.
무엇이 보였는가
동화가 보였는가, 참혹한 현실이 보였는가?
중학생 때였던가, 고등학생 때였던가. 그날은 확실히 동화를 보았다. 충격적으로 잔인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오필리아는 다시 공주님이 되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였기에 이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그랬었는데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삐딱해져 버린 것일까. 이젠 오필리아의 망상이 보인다. 마치 착시현상 같다. 같은 것을 보고도 익숙한 것, 보고자 하는 것에 따라 이리 달리 보이는 것이.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
처음엔 오필리아만 보았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들만 보았고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다. 그날로부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에겐 지식과 경험이 쌓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것들도 보았다. 동화를 가장한 현실, 오필리아가 아닌 그녀 주변의 것들. 배움이 그래서 필요가 보다. 보지 못했던 것도 발견해낼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