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웨이츠, 폴 웨이츠 감독의 어바웃 어 보이(2002)
존재의 부정이 아닌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굉장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평생을 두고 보고 싶은 영화다. 전반적으로 어색함도 없었고, 재밌으면서도 임팩트 있었다. 전개 방식도 좋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건 도입부와 엔딩, 섬으로 시작해서 섬으로 끝나는 것. 영화의 구조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난 윌이라는 개인의 생각을 집단의 사고로 뭉개버리지 않았단 점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어떤 영화가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보통은 결말이 그 개인의 반성으로 끝이 나거나 아니면 이를 역으로 꼬아 그의 변화를 강요한 사회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서로 조금은 다른 형태이긴 했지만 사회에서 보면 각각의 섬이었던 윌과 마커스를 지켜주었다. 다만 섬의 형태를 유지하되 마지막엔 그 섬의 의미를 조금 달리했다. 이는 두 섬을 부정한 것도, 섬을 비난하는 사회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단지 섬의 의미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봄을 택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부의 섬들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돼 있다"
이런 방식의 사고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보다 나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든 부분이다.
사는데 3명은 필요하다는 자와 혼자서도 잘 사는 자
영화에서 장면으로 인물을 표현한 부분이 많았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역으로 가는 윌을 표현한 장면뿐이지만. 아무튼 영화는 인물의 성격적으로든, 생활방식으로든, 대사로든, 영화적으로 표현된 장면에서든 윌과 마커스를 사회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들로 잘 표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와 동떨어진 이 두 사람은 다르다. 둘 다 섬으로 존재하지만 추구하는 바가 너무나 다르다. 일단 윌의 경우 자발적인 섬이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인간관계를 가진다. 자기만의 체계도 있다. 너무나도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반해 마커스는 비자발적 섬이다. 사회에 섞여들고 싶지만 평범하지 않아 섬이 되었다. 자유로워지려고 해도 엄마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고, 사회에 종속되고 싶어도 남들과 달라(가정환경 때문인지, 사회성 결여로 인한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지도 못한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유사한 듯하면서도 너무나 상반되는, 그래서 윌도, 마커스도 서로에게 끌렸을 것 같다. 은근한 동질감의 발견으로 서로의 뇌리에 남았을 것이고 각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뭔가를 발견함으로써 서로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여기서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두 사람이 서로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두 관계에 대한 개연성의 발견 말이다.
우린 어쩌다 삶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생각하게 된 것일까
윌의 편에서 영화를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보면서 은근히 불편했다. 윌의 주변인들은 마치 본인의 삶이 우월한 양, 자신들의 삶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인 양 굴어서 속이 뒤틀렸다. 내가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겠다는데 꼭 어딘가에 매여 자신을 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도 그런 의미 찾는 삶, 의미에 목매는 삶을 살면서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윌의 편에 서게 된 거지?
이런 의문이 뒤에 따라붙긴 했는데 그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조금은 막막하다. 그래서 난 스스로 보다 선행적인 것에 대해 먼저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쓰는 김에 후행적인 것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겠다.
'인간은 어쩌다 삶의 의미를 중시하게 되었는가? 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의미가 없어지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난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인간이라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 칭하면서 자신의 존재, 그 의미를 탐구하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일까? 그 역사가 그리 길지도 않을 뿐더러, 몇몇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즉, 살면서 필수적이진 않다는 말이다. 개인에게 플러스 알파를 줄 수 있을지언정, 어쩌면 마이너스 알파를 선사할 수도 있는 이것은 살면서 없어선 안 된다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안타깝게도 우린 이미 그리 사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삶의 의미 찾기에 목적을 두는 이마저 있다. 나도 그 부류 중 하나이고. 그런데 애초에 이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에 마이너스가 존재할까? 남들과 또는 나 자신과 지금의 나를 서로 비교하며 나의 가치를 매기는 일을 할까? 어쩌면 우리가 있는 김에, 어차피 익숙해진 김에 좋게좋게 생각하자 그리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