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의 아토믹 블론드(2017)
속고 속이다
스파이는 비밀스럽게 움직인다. 그리고 주변을 속인다. 우린 자기 자신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나의 과거 경험을 통해, 현재 상태를 통해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시인이라면 주변을 감성적으로, 예민하게 어쩌면 부드럽고 여유롭게 바라볼 것이다. 록스타라면 다소 거칠게 보려나? 아무튼 우린 자신이 마주해오던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편안한 관계를 맺기 힘들 것이다. 내가 남을 속이는 만큼 남들도 자신을 속이려 들 거란 생각에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생각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하겠지만.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다. 관객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게로, 극 중 인물에게로 몰입하면 할수록 관객 또한 의심이 늘어난다. 진짜 스파이처럼 내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자세로 임하게 된다. 여기엔 감독에게 속기 싫은 마음, 영화가 이끄는 방향에 저항하려는 마음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새철은 과연 누구인가, 퍼시벌인가, 로레인인가, 그것도 아님 제삼자인가, 새철의 정체가 밝혀는 지는가 등을 놓고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의심이 그 이전에 우리가 로레인 또는 그 외의 스파이들에게 동화되어 마치 우리가 스파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더 그런 행동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혼란
사기꾼은 언변이 화려하다. 남을 속이려면 혼을 쏙 빼놓아야 하니까. 이 영화의 연출이 꼭 그렇다. 상당히 화려하고 정신이 없다. 액션씬에서는 카메라가 어지러울 정도로 정신없이 배우의 앞과 뒤, 좌우를 바삐 따라간다. 편집도 감미롭지가 않다. 주어진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다음으로, 다음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여유 없이 긴박하게 움직인다. 베를린에서의 상황에 집중하려 들면 어느새 영국이고 뭘 좀 이해하려 들면 그새 다른 씬으로 넘어가 있다. 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가도 잠깐 사이 다른 인물에게 화면은 도달해 있다. 음향도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 발생할 법한 일상 소리 위로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이 겹친다. 그렇게 우리의 귀도 마비시킨다. 정말 영화 자체가 사기꾼 같다.
그저 게임일 뿐
이 영화의 중심엔 목숨이 걸려있다. 누가 다음 타깃인가. 누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우린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 배웠다. 애초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일반적으로 우린 자기 자신의 목숨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보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내 목숨 귀한 만큼 남의 목숨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사람 목숨이 가볍다. 죽이는데 서로가 주저함이 없다. 생채기를 입히는 것도 서슴없다. 머리가 깨져도, 얼굴이 뜯겨나가도, 그 누구도, (개인차는 있겠지만) 관객도 개의치 않아 한다.
이 모든 게 퍼시벌이 말한 것처럼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존재하는 게임일 뿐이다. 게임은 가짜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과 잔혹함이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많은 영화가 현실감 있게 만들어진다. 그런 영화는 작은 사건 하나에도 괜히 보는 내가 다 불안해진다. 그런 반면 아토믹 블론드와 같이 ‘이건 영화다, 이건 게임이다’ 하는 사실을 인위적인 연출을 통해 자꾸 각인시키고 완전한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영화로부터 깨어나게 만드는 영화나 B급 영화처럼 현실적으로 봤을 땐 크게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는 불안보다는 스릴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 세상에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 장면, 주제도 게임이나 영화 안에선 한 판하고 나면 리셋된다.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지금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때문에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