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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Aug 18. 2024

캐치 미 이프 유 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


부족한 것


범죄의 시작은 결여였다. 프랭크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그러나 곧 좋지 못한 상황에 의해 그의 주변 환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좋은 집과 좋은 학교를 잃고 어머니마저 다른 놈에게 뺏긴다.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 아이는 결국 가족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범죄행위가 시작된다.


도입부에서의 프랭크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프랭크. 어느 순간에서 봐도 프랭크는 가족에게 유난히 강한 애착을 보인다. 불안감.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과의 분리와 그들로부터 앞으로는 사랑받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데 대한 두려움이 그의 불안감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만약 프랭크, 이 아이가 부모로부터 충분한 안정감과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을 받았더라면 그는 연기가 아닌 실제로 그 역할들을 본인의 직업으로써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채워지는 것


프랭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것은 칼이었다. 그는 프랭크를 쫓아다니면서 점점 그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칼은 프랭크의 심리상태나 그가 할 것이라 추정되는 일을 늘 고민한다. 프랭크에 관한 정보를 다량 수집하며 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그를 잡기 위한 일이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극 중 프랭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칼이다. 프랭크 입장에선 쫓기고 있는 현실이 힘들지만, 부모에게 받지 못한 관심을 칼로부터 받고 있다는 점,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의 잘못을 잘못됐다고 말해주는, 흔히 우리가 기대하는 어른의 모습을 칼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 한 쪽에 각인된다. 이 각인은 크리스마스만 되면 수면위로 올라와 칼에게 통화하게 만든다.


칼은 경찰(정확하게는 FBI)이다. 무능하고 웃음거리에 불과한 경찰이다. 똑똑한 사기꾼에게 놀아나는 바보 중의 바보다. 칼은 그런 인식을 뒤로하고 끈질기게 프랭크를 쫓는다. 그리고 마지막엔 결국 프랭크를 잡는다. 한발 더 나아가 프랭크를 경찰의 편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칼은 영화 속에서 희화화되는 경찰과는 다르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흔히 떠올릴 법한 경찰과도 다르다. 그는 보통의 경찰이라기보단 좀 더 특색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면이 강하고 인간적이다. 그가 범인을 잡는 과정을 살펴보면 상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프랭크를 단순히 범죄자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한다. 심지어 프랭크를 대하는 모습마저도 그러하다.


프랭크는 인간적인 관계가 필요한 아이다. 그리고 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범인을 쫓는 경찰이다. 결국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채워줄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


프랭크는 아이다. 부모라는 울타리가 견고했으면 좋겠고 가족이 늘 함께했으면 좋겠고 부모가 나쁜 일을 하는 자신을 보고 혼내고 말려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어머니는 프랭크가 아닌 새로운 아이의 어머니로 그를 영영 떠나버렸다. 프랭크의 범죄가 끝나는 시점은 정말 더는 가족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단 사실을 깨닫게 된 시점과 같다. 도망과 사기, 연기라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막을 내리고 그는 남아있던 미련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런 그를 잡아준 것이 칼이다. 칼은 자신의 곁에 함께 있어 주고 자신을 지속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해 줄 사람은 부모뿐이라 믿는 프랭크에게 다른 길을 던져준다.


영화 곳곳에 사람들 틈에 껴서 즐기는 프랭크를 봤지만, 그가 그 안에 진정으로 소속되어있단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를 상황과 거짓된 모습으로 맺어진 관계는 그 당사자에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에게도 불안감과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엔딩에서 만나게 되는 프랭크는 다르다. 자신의 모든 것이던 부모를 잃고 칼이 내민 손을 잡게 된 프랭크는 다시 사람들 속에 끼어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는 불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능으로 쓸모를 다하고 있다. 이제 그는 부모와 자식,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진짜 사회인이 되었다. 강하게 원하던 것을 잃음으로써,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배우고 얻음으로써.


아이가 가족에게 너무 집착하게 되면 더 나은 것을 배울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아이가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한 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그늘에서 조금씩은 멀어질 필요가 있다. 비록 프랭크는 극단적인 상황에 맞닥뜨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멀어지게 됐지만, 그에겐 이별이라는 이 과격한 계기가 어른이 될 기회로 작용했다. 이런 의미 부여가 엔딩에 대한 안타까움, 아쉬움으로부터 비롯된 위로 내지는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그가 뭔가를 얻었고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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