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건축의 기억과 공예마을
<도시읽기 - 부여 규암마을>
공주문화도시 자문을 가는 길에 부여와 규암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보고싶었던 정림사지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을 보지는 못했지만 부여 산책은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방치되다시피한 박물관과 문화재 주변의 도시를 어떻게 관리해야할까 하는 고민을 뒤로하고 규암마을로 향했습니다.
부여와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규암마을은 굉장히 독특한 마을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여에서 규암마을로 가려면 백제교를 넘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도착점을 중심으로 도시가 양쪽으로 펼쳐지는데 규암마을은 도착점의 왼쪽으로만 마을이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백제교는 비교적 최근(1968)에 만들어진 다리이며 다리가 없을 때에는 나룻배를 통해 왕래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금강 경제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나루터를 중심으로 마을이 펼쳐졌고 나루터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규암마을의 중심길인 자온길인 겁니다. 현재의 나루터는 자온길의 끝자락과 약간 빗겨나 있는데 아마도 현재의 나루터는 부여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루터이고, 물산이 모이는 나루터가 자온길의 끝자락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과거 부여와 규암마을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부여는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이고,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규암마을은 거주하는 마을입니다. 규암마을을 대도시 주변의 위성도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위성도시는 아닙니다. 큰 지도를 놓고 보면 규암마을은 많은 물산이 나오는 서해안지방에서 부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거기에 사리 때에는 바닷물이 들어올 정도로 물이 깊은 강을 끼고 있고, 큰 도시인 부여가 인근에 있다는 것은 규암마을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입지를 이야기해주고 있으며, 한때 200호가 넘는 큰 마을이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규암마을에 들어서면서 낯설게 느껴진 모습 중 하나가 건물에 비해 길폭이 넓다는 것입니다. 이는 규암마을의 경제력을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규암오일장이 부여 오일장보다 더 커지면서 많은 상인들이 오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길폭은 자연스럽게 넓어졌을 것입니다. 부여지역에서 나오는 물산이 모이고, 금강에서 올라오는 물산이 모이고, 서해안에서 모이는 물산들이 더해져 오일장은 번성하였고 규암마을 노인회장님의 말씀으로는 삼일장이 설 정도였다고 하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번성한 곳이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동하는 길의 폭과 물산이 이동하는 길의 폭은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자동차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신작로는 사람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넓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온길과 규암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이 넓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규암마을에는 다양한 시대의 집과 건물들이 있습니다. 워낙 번창했던 곳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1930년대의 한옥도 있고, 일제시대의 상점이나 주택도 보이고, 1960년대의 벽돌건물과 현대의 건물까지 마을 전체가 근현대 100년의 건물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근현대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가치를 저보다 먼저 알아보고 노력한 분들이 계십니다.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자온길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계신 (주)세간이 있고, 123사비 청년공예인 창작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진행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프로젝트의 평가는 뒤로하고 일단 지역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업을 진행했다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을 모으고 문화자원을 만들고 마을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국의 공예인들의 성지로 만들고, 이 분들이 모여서 공예품을 파는 장을 열고,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공예오일장 공예삼일장을 만들어서 전국의 공예인들이 모인다면 얼마나 멋있을까요. 장날마다 공예인들이 모여서 공예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공예 기술을 공유하고, 공예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헌책방으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헤이온와이보다 더 아름답고 활기찬 21세기 규암공예마을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