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딜쿠샤
그곳으로 가는 이정표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권율 장군 집터의 커다란 은행나무는 주변의 웬만한 집들보다 높아서 지붕 너머로 보이긴 하지만 나무의 모양을 잘 기억해야만 그 나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딜쿠샤(Dilkusha)에 다녀왔습니다. 초석을 보면 1923년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면 지은 지 햇수로 100년이 되는 집인데 미국의 기업인이면서 3.1 운동을 외국에 알린 언론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와 부인 메리 테일러(Mary Taylor)가 함께 살던 집으로 딜쿠샤 Dilkusha는 힌디어로 '이상향'이라는 뜻입니다. 2019년에 공사 중인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공사 전에는 여러 가구의 주민들이 점유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지금은 원형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딜쿠샤는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비밀에 둘러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주택 실내와 살림살이들을 복원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을 작년에 읽고 나니 궁금증이 더 커졌습니다. 공간과 역사를 좋아하는 나에게 새로운 유희를 안겨준 책이었고, 공간 안에 담긴 수많은 문화예술적 심미안을 따라가는 것은 흥미진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산책하다 외관을 보면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내부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딜쿠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주택입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주택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온돌이 아닌 벽난로가 있고, 목조가 아닌 벽돌구조이며, 2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현관 가까운 곳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등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문화적 충격을 받을만한 구조였을 것입니다. 집주인이 떠난 후 비어 있는 집을 점유한 지역주민들은 이 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며 혹시 살고 있던 주민들을 인터뷰한 것은 없을지 궁금해집니다.
지자체마다 딜쿠샤처럼 오래된 건축물을 복원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일이 참 많아졌습니다. 조선시대 관청이나 역사적 건축물만이 아닌 근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존중해야 할 건축물의 연도를 최대한 현대까지 이어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나라이다 보니 건축물의 연한도 굉장히 짧습니다. 20여 년밖에 안된 아파트가 구조안전진단에 탈락됐다고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렇다고 오래된 건축물을 박제하듯 보존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서서 구경만 하는 공간이 아닌 실제 집주인이 그랬듯이 의자에 앉아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공간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딜쿠샤를 나와 인근에 있는 사직커피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사직터널을 오가는 자동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딜쿠샤에서 커피 한 잔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숭례문, 광화문 누각에서 도시를 바라보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