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한 것들을 즐겨야지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퍼거슨의 발언(실은 '시간 낭비'라는 평범한 표현이었다고 한다)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왜 시간을 쓰냐는 말을 종종 들으며 산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고 한탄하거나 페이스북은 온라인 탑골공원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일견 맞는 얘기이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직 쓰는 자가 어떻게 쓰냐에 달렸다고. 각자가 선택한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나는 흘러 지나가버리는 일상의 한순간을 고이 박제해 뒀다가 생각날 때마다 혼자 즐겨보며 키득거릴 요량으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사용해왔다. 그런 도구로는 블로그도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두기도 했거니와 각 잡고 글 쓰고 사진을 붙이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페북이나 인스타는 사진 몇 장을 고르고 문장 몇 개만 적으면 되어서 부담 없고 가벼웠다. 페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능도 '과거의 오늘'이다. 아, 나 일 년 전에 이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네 벌써 그렇게 되었네! 이런 작은 기쁨을 가지는 게 좋았다. 미래의 내게 줄 선물을 마련하듯 일상을 적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은 자주 바뀌는 편이라, 언젠가부터 각 잡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사진을 열 장 스무 장씩 올리고 사진 아래에 설명도 적어보고. 그렇게 하려면 페북이나 인스타보다는 블로그가 나았다. 그리하여 거미줄 잔뜩 쳐진 블로그를 치우고 일상의 기록을 블로그로 옮겼다. 페북이나 인스타와 함께 병행할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사람은 아니라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페북과 인스타에 글을 쓰는 날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일 년 후에 뜰 과거의 오늘이 없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얼마 전 블로그 이웃분의 글을 읽고 댓글을 적으려고 페북에 들어갔다. 페북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어떤 분의 짧은 글을 블로그 이웃분에게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찾으려는 글은 금세 잊어버리고 내 페북의 스크롤을 계속 아래로 내리면서 구경했다. '와! 나 이때 밤 조림 만들었구나. 그래, 두 번 만들고 두 번 다 실패해서 세 번 도전하려다가 손목 나갈까 봐 참았었지. 그렇지, 나 이때 내 생일이라고 딸기 생크림 케이크 구웠었는데. 올해도 구워야 하는데 한동안 베이킹 쉬어서 잘 될 수 있으려나. 아, 나 이때 바르셀로나 갔었구나. 구엘 공원이며 사그라다 파밀리아며 꼭 다시 가고 싶다.' 정말 시간 가는지 모르며 스크롤을 쭉쭉 내렸다. 재밌어 재밌어 과거의 나 보는 거 재밌어!
그러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록하는 행위라는 게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내 시간을 쓰는 일인가 하고. 과거의 오늘을 돌아보며 웃는 시간과 미래에 즐거워할 나를 위해 기록하는 데 현재의 시간이 쓰이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현재는 어쩐지 늘 과거와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확대 해석하는 것일까. 물론 나는 현재 글을 쓰는 시간, 그림을 그리는 시간, 빵을 굽는 시간 자체를 즐긴다(고 느낀다). 하지만 머릿속 한 귀퉁이에는, 일 년 뒤에는 글 쓰는 사람으로 좀 더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아닐걸?) 이 년 뒤에는 내가 그리고 싶은 장면과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종이에 옮길 수 있을까? (글쎄) 삼 년 뒤에는 제과점에서 파는 케이크처럼 프로페셔널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늘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다.
맷 킬링스워스는 마인드-원더링(mind wandering), 즉 무언가를 하는 동안 그 일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행복 지수가 낮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알아냈다고 한다.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행복감을 훨씬 많이 느낀다고 한다. 현재가 재미없고 행복하지 않아서 마인드 원더링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불행이 마인드 원더링을 불러낸다는 통계적 연관성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왜 젊었을 때는 이걸 하지 않았는지, 그때부터 했으면 지금은 아주 전문가가 되었겠구먼 하는 생각들은 다 집어치우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만 집중하라는 얘기인 듯하다. 그러게.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세상이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서 다들 막 발 동동 구르고 어쩔 줄 몰랐겠지.
그런데 나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오직 거기에만 집중을 한다. 막 한 시간이 십 분이다. 내가 그린 거 보고 자화자찬하고 기분도 좋다. 그 순간은 좋았다. 근데 뒤돌아서잖아? 아니 그래서 이걸 어디다 쓴다고 내가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스쳐 간다. 그럼 난 행복한 사람일까 불행한 사람일까. 한 시간 행복했고 일초 불행했으니까 대충 행복한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 내가 미는 인생 모토가 있다. 무용한 것들을 마음껏 즐기자. 무용이고 유용이고 용(用) 자체를 생각을 말자. 단어 사전에서 지워 버리자. 이걸 하면 내게 대체 어떤 소용이 있겠냐 하는 생각만 지워도 행복의 순도가 높아질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용을 지우고 내일부터 페이스북에도 오늘의 나를 기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