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티켓부터 냅다 예매했던 나를 칭찬해
2018년 1월 말 암스텔 베인에서의 밤에 충동적으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취소도 환불도 안 되는 표로.
그 당시 나는 회사의 유럽법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년을 예상했던 근무 기간이 1년으로 단축되어 한국으로의 귀국을 한 달여 남긴 때였다. 함께 근무했던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이 결정된 건 그 전해의 늦가을 즈음이었다. 첫 해에는 일에 집중하고 두 번째 해부터 여행을 다니자 했던 터라 우리는 네덜란드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급한 대로 17년 11월부터 남편과 주말을 끼워 2박 3일 정도로 몇 곳을 여행했다. 남편이 유학했던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스페인의 세비야를 함께 다녀왔고 스위스 인터라켄에 가려고 했으나 남편 귀국 일정 바로 전주였던지라 결국 취소했다. 1월 말에 피렌체를 혼자서 다녀온 뒤 두오모의 여운이 한창인 시점에 바르셀로나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는 생각으로.
피렌체가 과거의 시간 속에 잠긴 곳이었다면 바르셀로나는 현재를 사는 도시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도 현재 진행이지 않은가. 몬주익 성에서 케이블카를 타려던 계획이 좌절되어(하필 점검 기간이었다) 쓸데없이 많이 걸어 지쳤던 오후, 카탈루냐 역 뒷골목 작은 카페에 앉아 핸드폰 메모 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도시구나
세련됐다
잘 사는구나
현재를 사는 도시
세상 날티를 다 모였나, 날티 밀집 도시
잘생긴 남자도 엄청 많아
개도 정말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르셀로나를 가우디 작품들을 보러 간다던데 나는 가우디보다는 칼솟타다 때문이었다. 친한 선배가 세 딸과 갔던 바르셀로나 여행기에서 가장 눈이 갔던 장면은, 세 아이들이 열심히 직화구이 칼솟타다를 벗겨서 소스에 찍어 오물오물 먹던 영상이었다. 생긴 건 꼭 우리나라 대파처럼 생겼다. 아, 저것이 대체 무슨 맛이 날까, 대파 맛이 날까, 저 소스는 무슨 맛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배가 추천해줬던 식당에 혼자 가서 칼솟타다와 세크레토 구이와 토마토소스가 발린 계란 토스트를 주문했다. 왜 여행지만 가면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은지. 혼자서 벅차긴 했지만 나중은 없다는 생각으로 기본 세 개씩은 주문했더랬다.
칼솟타다는 대파라기보다는 양파에 가까운 맛이었다. 달달한 맛. 구운 칼솟에서 나는 달달한 향이 식욕을 마구 자극했다. 딱 그 향 같은 맛이 났으면 하는 심정으로 맛봤는데 맛에는 향이 다 담기지 못해 아쉬웠다. 칼솟타다에 함께 나오는 소스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땅콩버터 맛이 나는 달달한 소스였는데 애석하게도 땅콩버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소스 없이 구워진 칼솟만 먹었는데 그 자체로 더 맛이 좋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맛이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끔씩 생각난다. 칼솟타다 다시 먹고 싶다고.
우습게도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빨간 파프리카 볶음이었다. 투어 가이드가 추천한 타파스 식당에 들어가 세크레토 구이를 주문했는데 파프리카 볶음이 함께 곁들여 나왔다. 전혀 기대 없이 입 안에 넣었는데 감칠맛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평소 파프리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볶음은 달고 입에 막 착착 감겼다. 투어 가이드분이 병이나 캔에 담긴 파프리카 볶음을 슈퍼에서 흔히 살 수 있다고 말해주셨는데, 그걸 못 사 왔다.
대망의 가우디 투어. 까사 바트요와 구엘 공원을 거쳐 도착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서, 왜 사람들이 가우디 가우디 하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는 숲 속이었다. 시원하고 밝고 더없이 따뜻한데 매우 청량하고 싱그러운 숲 속. 어떻게 건물 안에서 그런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끔 하는지. 나의 짧은 언어로는 설명이 어렵다. 직접 볼 수밖에. 그래. 사그라다 파밀리아 한 곳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바르셀로나에 와야 했어. 세상에. 어쩌면 나는 평생 이걸 못 본채 살 뻔했어.
한국으로 들어가더라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나가자더니, 제주도만 가려고 해도 구시렁거리는 남편. 역시 사람은 화장실 나올 때 다른 법이라. 그 말을 믿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한 분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데 몇 년 후면 결혼도 해야 하니 씀씀이를 생각해서 망설여진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결혼을 한 많은 선배(?)들이 손에 쌍심지를 켜고 톡을 다다다 쏘아댔다. “제발 지금 해요! 지금 다아아아아 해요. 많이 많이 많이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살다가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쩔 수 없던 사정들도 꼭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 사정이라는 게 정말 피치 못할 것이었다는 확신이 없을 때도 많았다. 대학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가자던 친구에게 돈도 없고 (가족들도 못 간 곳을) 나 혼자 가는 것도 미안하다며 거절했지만, 정말 그 마음 때문이었나.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늘려서라도 돈을 마련하는 게 귀찮았고 서울도 적응하기 어려웠던 지방 출신이라 한국 밖을 벗어나는 게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때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다면 인생까지는 아니라도 가치관 정도는 바뀌지 않았을까.
지금은 코로나19라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 같이 발이 묶여 있지만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나는 움직이기 어려울 게다. 내게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일까.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되면 꼭 다시 보러 가고 싶다. 그때 바르셀로나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터져버릴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