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답을 내고 싶다
손가락이 갈라진 살갗 속에 흙이 어찌나 깊이 박혀 있는지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스토너 다섯 번째 페이지에 적혀 있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장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건 손톱 밑이 새까만 누군가의 손 때문이었다. 고추 지지대 300개를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오늘 아침은 물에 말아 김치에 훌훌 먹었지.”라는 문장을 얘기하듯 덤덤하게 읊조리던 옆집 어머님. 살면서 여러 어른을 만났지만 그렇게 소박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얘기해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욕심도 없고 남의 험담도 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사람. 여러 사정으로 365일 중에 300일 이상을 일하지만 불평하지 않는 사람.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돈을 받고 하는 남의 농사와 돈을 받고 팔 자신의 농사일을 모두 다 하느라 늘 시간이 없으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 내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분을 보며 가끔 생각한다. 초등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인터넷 세상은 전혀 모른 채로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60대 이상의 여성은 어떤 삶을 꿈꿀까.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무니, 어무니는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어떤 삶을 원해요? 하고 물으면, 에이, 다 산 사람한테 싱거운 소리 하지 말어. 그럴 시간에 밭이나 한번 더 매. 라며 손사래를 치실 것 같다. 그런 질문이 그분의 삶에 필요할까? 어쩌면 어떤 삶을 원하냐는 질문은 책상 앞에서 숫자로 이뤄진 세상을 사는 사람의 건방진 질문 같은 건 아닐까 ,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삶이 ‘진짜’ 아닐까? 어머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거지? 어디로 가는 중이지?
일단 시골로 왔다. 하기 싫은 일에 내 시간을 바쳐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소비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다시 묵묵히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삶에서 탈출하고자 여기로 왔다. 그게 탈출이 맞았을까? 혹시 도피는 아니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무한 루프의 삶에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결국 낙오자인 건 아닐까? 하고 여전히 곱씹어보기는 하지만, 다 됐고, 지금의 삶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월의 아침 해 속에서 누런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 초록의 잡초를 뽑아내며, 맞아 내가 이런 별 시답잖은 일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였지, 충만감에 벅차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원적인 질문은 계속된다. 여기가 끝일까? 이 다음은 없는 걸까?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설렁설렁 가족들이 먹을 작물을 키우는 게 내가 원했던 전부일까? 네. 그럼요. 여기가 끝이에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젊은것 같다.
누가 정답을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옆집 어머님처럼 삶의 의미나 목적을 애써 찾을 필요 없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 내는 게 진짜인지, 끊임없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며 사는 게 진짜인지. 이거 해서 대체 어디다 쓸까 싶은 무용한 일들을 하며 혼자 만족하는 마음이 진짜인지, 쓸모 있는 일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써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게 진짜인지.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어크로스(2021), p69
이 구절을 만난 뒤 스스로에게 멋진 포장지를 둘렀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하는 건 질문을 사는 중이라 그렇다고. 그 질문이야 말로 쉽게 해결책을 낼 수 없는 문제이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라고.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질문을 사느라 답을 못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여전히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형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자기 답을 적어야 하는 주관식은 풀지 못하는 뇌. 여러 개의 보기 중에서 내 정답이 아닌 ‘절대적인 정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뇌. 결국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정답을 찾아서 정답대로 사는 거. 그래서 실패하지 않는 거. 물론 어디에도 정답은 없고 결국 본인이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정답이었으면 좋겠고 반드시 정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살면서 무수한 오답을 내었으니 남은 시간은 반드시 정답을 풀고 싶다는 욕망과 답을 찾아 그 답에 따라 살아왔는데 결국 오답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유예하는 태도.
결국 진짜를 찾으려면 정답을 바라는 태도부터 버려야 할 것 같다. ‘어떻게’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