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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린결말 May 06. 2022

귀농 아니고 귀촌이요

농민은 아무나 되나요



이곳에 내려온 첫 해에는 무턱대고 배추를 209포기나 심었다. 7월 말 여름의 한 복판에 내려왔으니 봄부터 기르는 작물은 시도할 수 없었고 시기상 배추, 무 같은 가을 농사 작물이 가능했다. 고작 두 사람이면서 209포기나 심은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전부 다 자랄 리 없다, 절반만 건져도 성공이다라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수확한 배추를 절여서 친정 엄마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배추 209포기를 심고 허리가 아프다며 징징대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 귀농 아닌데, 귀촌인데.’라는 문구와 함께.


지인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귀농이네’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럴 때마다 아니라고 정정해 주었지만 지인들 눈에는 역시 우리 땅이 넓어도 너무 넓다. 아니 내 눈에도 넓다. 고추 300포기를 심을 때도 마늘 20접을 수확할 때도 서리태를 150평 밭에 심을 때도 어김없이 귀농귀촌 논란이 일자, 관전하던 한 분이 물었다.


두 개 차이가 뭐예요?




농사를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몇 가지 있다. 농업인, 농부, 농민.


‘농업인’은 법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로, 1000㎡(대략 300평) 이상의 농지를 경작하거나, 생산한 농산물 판매액이 연간 120만 원 이상인 사람을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나는 농업인이다. 500평의 밭에 농사를 짓고 있고 농업경영체도 등록하였다. ‘농부’는 농사짓는 사람이다. 작은 땅에라도 작물을 심어 기른다면 농부라고 할 수 있겠다. ‘농민’은 농사짓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자신이 재배한 농산품에서 나온 소득으로 생계를 꾸리는 분들이다. 귀농은 이렇게 시골로 내려가서 농민이 되는 일을 뜻한다. 귀촌은 시골로 가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밥벌이를 하며 사는 걸 말한다. 농사를 지을 수는 있겠지만 농민은 아닌 셈이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농업인, 농부는 되었지만 농민은 아니다. 우리 부부가 소꿉장난 하듯이 짓는 농사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돈을 얻어내야 하는 농사를 지을 능력도 없고 농업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계 수단이 되는 순간 지금처럼 설렁설렁, 되면 되는대로 말면 마는 대로 지을 수는 없게 된다.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작물을 어떻게 다수확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상품성을 확보할 것인지, 어느 판로로 판매해야 이득이 더 있을 것인지 등에 쏟아야 한다. 제품의 기획부터 생산, 판매까지 모두 해내야 하는 농민은 전천후 멀티플레이어가 아닐까.




우리가 귀촌 치고는 농사를 많이 짓긴 한다.


집을 짓고도 대략 500평의 밭이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 밭에 심을 온갖 작물들을 고르고 구획을 나누고 별 상상을 다 했더랬다. 땅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욕심도 부렸다. 여기 와서 직접 해보니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기에는 땅이 넓어도 너무 넓다. 귀촌 선배들은 작물 가꾸는 땅은 100평이 넘지 않는 게 좋다고들 말한다. 그 이상이 넘어가면 땅에 메이게 된다고. 역시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은 틀림이 없다. 농민은 아니지만 우리도 대체로 땅에 메여 산다.


다품종 소량 생산은 진즉에 집어치웠다. 계절마다 필요한 채소들은 집 옆의 열다섯 평 작은 텃밭이면 충분하다. 넓은 밭에는 저장성이 좋은 네 가지를 재배한다. 한국인이라면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고춧가루용 빨간 고추, 별 재료 없는 비빔밥도 휘휘 두르기만 하면 끝장나는 맛이 되는 들기름용 들깨, 일 년 삼백육십오일 모든 요리에 필수인 마늘, 콩장도 해 먹고 콩물도 만드는 서리태가 500평을 책임지는 주요 작물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저장성이 좋아서 다수확을 해도 문제없다.


작년에는 고추 300포기를 심어서 150근의 건고추를 수확했다. 덕분에 친정과 시댁은 기본이요, 외할머니에 남편의 외삼촌, 형님의 어머님까지 두루두루 챙길 수 있었다. 마늘도 스무 접을 수확해 여기저기 나눠주고도 아직도 먹고 있다. 바로 짠 들기름 맛은 어떤가. 질 좋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저리 가라다. 꽃향기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건가 의아하기만 하다. 서리태로는 이삼일에 한 번씩 콩장을 만들고 있다. 남편이 그렇게 콩장을 좋아한다. 나는 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오늘은 이소플라본 섭취 좀 해줘야겠는데? 싶을 때만 조금씩 먹는다.


유월 초에 수확한 마늘, 칠월 말에 처음으로 따서 말렸던 고추,  시월 중순에 열심히 털었던 들깨,  십일월 중순에 깠던 서리태



귀촌하려면 농사짓는 땅은 몇 평정도가 적당할까.  


이건 정말 개인의 사정과 성향에 따라 다르다. 생계를 위한  외에 시간을 많이   있고 농사의 고단함도 수용할  있으며 체력이 된다 하면 300평에서 500 사이쯤 지어도 괜찮을  같다.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면 정부 보조금과 농협 조합원 등록   가지 혜택이 있으니 기왕이면 300(정확히는 1,000) 이상 짓는 것도 좋겠다. 시간은 많지만  여름 뙤약볕에서 일하는  아무래도 힘들겠다 하면  평을 넘지 말자. 시간도 많고 농사도 적성에 맞지만 체력이 약하다면 역시   이상은 무리겠다.


귀농과 귀촌의 차이를 묻는 지인에게,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귀농이라고 대답했다. 지인이 다시 말했다. “생계가 뭐 따로 있나요, 스스로 먹을 거 농사지어 먹으면 되는 거죠.”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농민’이라는 단어에 과도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그래도 내 생각은 여전하다. 농사를 지어 이윤을 내고 자신만의 농사 철학을 가진 농민이 내게는 위대해 보인다. 나는 그 이름을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그냥 귀촌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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