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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린결말 Feb 26. 2023

마음의 이해


남편은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 제목을 보고 꼭 무슨 대학교 교양 강의 이름 같다고 말했다. 그러게. 사랑도 심오하고 이해도 모호하다. 깊게 탐구할 만한 교양 과목 같네. 그 드라마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차고앉아 '완벽'하게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모두 휘발되고 말았다.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꽤나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가 '글감이 없다'인데, 게으름은 어렵게 생겨난 글감도 발로 뻥 차버리고 마는 것이다. 게으름과 완벽주의의 콜라보가 이렇다.


지난주에 꿰차고 있던 재활용 선별장 용역 사업계획서가 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아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중 제일 힘들었던 점은 죽은 듯이 보냈던 회사 생활 마지막 1년의 감정이 되살아났던 부분이다. 아, 내가 이래서 일을 잘 못했었지 참, 하고 새삼스럽게 그 시절이 기억나버렸네.


하지만 지금 이 몇 줄을 적으며 지난주를 돌아보니 안타깝기도 하다. 뭘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지 싶은 게. 여기서 보니 별것도 아니었구먼. 점 하나에 매몰되면 고개 드는 법을 잊고 만다.


융통성. 이 단어는 늘 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내게 융통성은 '너는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니'로 자동완성된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날이었나. 중년의 담임 선생님이 내게 빈 병 하나를 버리라며 주셨는데, 병을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을 찾다 찾다 못 찾고 선생님께 다시 찾아가자 그녀가 내게 톡 쏘아붙인 말이었다. 그 말은 평생 뇌 한쪽에 살아 있다가 그렇게 자동완성된다.


기억력이라고는 국 끓여 먹으려도 없는데 바람처럼 지나가도 될 문장은 뭐 하려고 뇌에다가 박아놓고 사는지. 아마도 뇌가 아니라 마음에 박혀서겠지.


흐지부지 끝나버린 재활용 선별장 덕분에 이번 주의 절반은 홀가분하게 지냈다. 머리에 '재활용 선별장' 여섯 음절이 가득 차서 하루 종일 엉덩이만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었더니, 마음도 어찌나 가라앉던지.


어제는 싱싱한 야채가 먹고 싶어서 텃밭으로 나갔다. 지금 밭에는 새들이 다 쪼아 먹어버린 월동 시금치와 겨울 동안 얼었다가 이제 새로 싹이 나기 시작하는 토종 배추, 그리고 역시나 새로 초록 잎이 나고 있는 쪽파뿐이다. 먹을만한 건 토종 배추뿐.


밭에 쪼그리고 앉아 잎을 뜯어내고 싱크대에서 물로 씻어 멸치 액젓과 고춧가루와 설탕 조금에 들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쳤다. 이게 뭐라고 마음에 기지개가 켜질까. 수렵채취의 기억은 인간의 몸 어디에 기억되어 있는 걸까.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 보잘것없는 행위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부여해 주는 건지.


그러니까 몸이라니까? 마음이 축축 처질 때는 가만히 몸을 움직여야지. 마음의 이해는 대학교 교양 강의로나 줘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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