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는데 하루를 망치기에 좋은 꿈이었다.
평균 11시 반에 일어나지만 늘 “내일은 30분 일찍 일어나야지”하고 다짐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그 다음날은 11시, 그 다음날은 10시 반, 그 다음날은 10시에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9시 반에 일어나는 날엔 반드시 실패해서 새벽 여섯 시경에 잠들고, 오후 12시에 일어난다. 다시 다짐을 반복한다. 다음날은 11시 반에 그 다음날은 11시....그리고 9시 반에 일어나기에 실패해서 다시 12시....
접근하면, 9시 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뻥 차서 내 고향 12시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고 싶은 이유는 아침에 햇살이 있어서. 그리고 밤 12시부터 4시까지 혼자 깨어있는 시간이 괴롭기 때문이다.
12시경에 일어나 대충 씻고 도서관으로 가다가 악몽의 잔상 때문에 카페로 자전거 바퀴를 돌렸다. 우체국에서 문예지를 보내고 좋아하는 카페로 갔다. 이제 우체국 언니들이 나를 알아본다. 저분 또 오셨네? 스티커 구경해야지, 라고 말한다. 어떤 우체국에서는 스티커를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이 우체국에서는 다정하게 반겨줘서 좋다.
카페에서 볼라뇨의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읽고서 역자 후기를 읽었다. 역자 후기는 가급적 읽는 편이다. 왜냐하면...줄거리를 요약해주기 때문에. 나의 독서력에는 작은 흠이 있는데, 그건 줄거리 파악을 잘 못한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때 줄거리만 빼고 다 읽는 모양이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단편집이다. 역자는 그 단편 중 하나를 “이 소설은 성직자가 되려는 소년과 어느 살인자의 기막힌 조우를 그린 작품이다”라고 요약한다. ‘등장인물이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두 명이었군! 그 사람이 살인자였단 말이야? 어째...음산하더니.’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과 두 편의 에세이 <문학+병=병>과 <크툴루의 신화>”라는 역자의 문장 덕에 엊그제 읽은 이 두 편의 소설이 에세이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발견했다.
역자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세 번째 단편집이자 첫 번째 유작이 되었다”
보통 유작은 유일하다. 죽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 유작이니까. 만일 유작이 두 편이면 그 사람은 두 번 죽은 사람인 건가?
역자가 첫 번째 유작이라고 말하니 유작의 다음 편, 두 번째 유작, 세 번째 유작.....n번째 유작도 있을 것만 같다. 만일 모든 작품이 죽기 직전에 쓴 것이라면 작가가 쓴 모든 작품은 유작인지도 모른다.
책 소개에 이렇게 써도 웃길 것이다.
“***작가가 남긴 유작!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작품!”
그런데 ***작가는 아직 죽지 않아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구조로 마케팅을...하는 거지...
-이것은 제가 죽기 전에 쓴 작품입니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잖소
-죽기 직전입니다!
혹은 작가에게, 자신의 작품에서 유작을 고를 기회를 주어도 좋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유작이지만, 과연 그는 이 작품이 유작이기를 바랬을까? 아이폰에는 live photo라는 게 있는데, 사진이 찍히는 순간과 그 전후가 모두 찍히는 사진이다. 사진영상 혹은 영상사진인 이유는, 정지된 사진으로 보이지만 손가락을 갖다 대면 촬영 전후가 영상으로 함께 기록되어 느린 움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측의 편집 버튼을 누르면 하단에 파노라마처럼 사진이 펼쳐지고, 바를 움직여 대표 사진을 선택할 수 있다. 요딴식으로 글쓴이가 전 생애 걸쳐 파노라마처럼 써 내려간 작품들 중에서, 한 작품을 유작으로, 대표 사진으로 고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