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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nisland Feb 18. 2021

고집 있는 의자

의자로 보는 인간관계

고집 있는 의자


대학교 시절 꽈방에서 작업을 할 때 등받이와 좌석이 하나로 이어져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작업을 했었다.

딱히 취향이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닌 재학생으로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시설물을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과 그에 순응한 결과라고나 해야 할까...

단순하고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만난 이름도 모를 이 의자가 나는 편했다.


처음부터 이 의자가 반가웠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컴퓨터실이나 강의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자.

몇십, 몇백 개의 물량을 저렴한 가격에 납품하기 위해 대량 생산된 의자.

학습, 업무용 의자이지만 휘어진 등받이가 유일한 인체 공학적 설계의 흔적인 나무 의자.

나름 우드 벤딩 기술을 적용한 가구지만 북유럽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의자.

뻣뻣하게 생긴 모습 때문에 이 의자를 볼 때마다 '못생긴 놈이 고집만 있어가지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과방에 배치되어 있는 이 의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속으로 학교를 욕했었다.

이렇게 불편해 보이고 성의 없는 의자를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앉아있을지도 모를 곳에 제공하다니...

헤드레스트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엉덩이가 맞닿는 좌석 부분은 얇고 단단해 보여 굳은살이 박일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바로 이 의자!   컴퓨터실 의자라고 구글 크롬에서 검색해보니 똑같은 의자가 있었다. [하이솔로몬] 하이팩의자 HP102


하지만...

불만도 잠시 직접 앉아보고 사용해보니 오래 앉아있어도 허리가 뒤로 빠지거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서 신체 밸런스에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어서 장시간 앉아있을수록 꼿꼿하고 올바른 의자 형태에 맞춰 나의 체형이 교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휴게 공간에 놓여있는 라운지 의자처럼 너무 편안하지도 않았고, 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와 같이 너무 불편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의자에 앉았을 때 지나치게 퍼질러져 자세가 망가질 염려도 엉덩이가 아파서 금방 일어날 일도 없었다.

'난 나대로 있을 테니까 너도 너 대로 할 일에 집중해, 그게 서로 좋은 거야.'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그야말로 내가 의자에 앉아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적화된 '적당한 의자'였다.



적당한 거리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책상 앞에 오래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가끔씩 어쭙잖은 업무용 의자보다 그때 그 뻣뻣한 꽈방 의자가 종종 생각났다.

회사에서 쓸 수 없다면 나만의 개인 작업실이나 스튜디오에는 꼭 적당한 의자를 둬야지 하는 생각만 벌써 몇 년째.


수년 전 적당했던 그 의자는 아무리 가깝고 편한 사이라 하더라도 적당한 선과 거리를 지켜야 오래도록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인생 조언을 나에게 떠들어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으면 공원의 벤치 마냥 사람들이 금방 떠날 것이고, 멋진 디자인의 라운지 의자와 같이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더라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말랑말랑한 태도는 시간이 지나다 보면 편안함이 아니라 매력 없고 심심해서 관계를 망가뜨린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너무 편하다 보면 서로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순간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 인간으로서 이번 생을 살아가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시간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서로에게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역할이 추가되기도 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그 형태가 조금씩 변해간다.

그럴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가 아닐까?


함께 하면서도 서로의 가치와 기준을 존중할 수 있는 것,

떨어져 있어도 함께라는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

관계를 오랜 시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

관계의 적당한 거리.


그 의자가 나에게 어떤 말을 더 떠들어댔는지 나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을 지나 보내야 의자가 했던 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더 살아봐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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