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막바지에야 알게 된 평일의 여유
7시 30분쯤 되면 밥심으로 사는 우리 아들은 늦잠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어머니 아침 주세요.”
성실함 말고 이 아이에게 어떤 단어가 더 어울릴까. 째깍째깍 자기 임무에 맞게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계 같은 아이. 아이가 배고프다고 무언가 달라고 하는 외침은 아기가 빽빽 울건, 마흔이 된 자식이 말을 하건, 어느 엄마에게나 의무감을 갖게 하면서도 기쁜 소식일 것이다. 안 먹는 아이 억지로 먹이려 애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 반대급부만큼이나 밥 찾는 아이의 소식은 반갑다.
아침을 간단히 차려주고 학교에 가져갈 물통을 챙긴다. 한 모금도 먹고 오지 않겠지만, 혹시 오늘은 조금이라도 필요할까 싶어 물을 조금만 담아 넣는다.
딸아이는 밤중에 무섭다며 엄마 아빠 사이로 파고들어 단잠을 깨우더니, 정작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쿨쿨 잔다. 내가 아침에 집에 있는 동안이라도 실컷 자게 두고 싶어 그냥 둔다.
큰아이는 혹시 늦을까 싶어 10분 일찍 맞춰둔 알람이 울리자마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튕겨 나가 현관문을 나선다.
딸아이도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빗겨 묶어준다. 예전에 아이 친구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머리는 빗고 가야겠더라. 나도 회사 나갈 땐 우리 애도 그랬어.”
그 말이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생각난다. 엄마가 아침에 안 챙겨주는 아이처럼 보일까 봐서였을까. 새학기만큼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좋은 첫인상이 남길 바라며, 서툰 손으로 머리를 다듬어 묶어준다.
딸아이도 현관문을 나선다.
집에는 나 혼자 남는다.
커피를 내린다. 원두를 가는 소리는 시끄럽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커피 향이 좋다. 어쩌면 나는 커피의 맛보다도 이 향 때문에 집에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먹는지도 모르겠다.
소파 한쪽에 몸을 구겨 넣고 창밖을 보며 커피를 홀짝인다. 씁쓰름한 이 검은 액체를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도 찾을까.
휴대폰에서 증권사 알람이 울린다. 어제 크게 떨어졌던 주식창이 오늘은 조금 오른다고 한다. 괜히 고수라도 된 듯 ‘역시’라는 생각이 스친다. 사실은 그냥 무서워서 안 했던 것뿐인데.
유튜브를 열고 잠깐 쇼츠를 넘겨보다가 문득 멈춘다. 이걸 한 시간까지 보는 건 아니다 싶다.
몸을 일으킨다.
어젯밤, 오늘 오전에는 좀 걷기로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헬스장을 가려 했지만 밖이 걷기 좋은 봄 날씨라 근처 공원을 걷기로 한다.
밖으로 나서니 아직은 차가운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게 오히려 좋다. 추운 날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 기분과 비슷하다. 따뜻한 햇살을 피부로 느끼며 차가운 공기를 몸 안으로 들인다.
상쾌하다.
이어폰을 가지고 나왔지만 굳이 꽂지 않는다. 일상의 생활 소리를 듣는다. 이어폰으로 듣는 소리는 늘 팟캐스트의 영어 공부나 경제 뉴스였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더 발전하라고 나를 재촉하는 소리 같았다.
오늘만큼은, 아니 일주일 정도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돌아갈 그 곳에서 다시 받을 스트레스를 지금부터 끌어다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목적지 없이 걷는 이 시간이 좋다.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늘 효율을 생각했다. 기왕 걸을 거면 어디까지 가서 볼일 하나를 더 보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늘 그런 식이었다.
여유를 몰랐다.
그냥 걷는 것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을 잘 느끼지 못했다. 늘 스탬프 투어처럼 달성이라는 도장을 찍는 듯 살았던 것 같다.
오늘은 그렇게 걷지 않기로 한다.
공원을 한 바퀴 돌다 근처 도서관에 들어간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오던 도서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어린이 코너에 북적이던 아이들이 없는 평일 오전의 도서관은 조용하다.
창가로 햇살이 들어오고 책 넘기는 소리와 신문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을 책 몇 권과 딸아이가 읽을 책을 함께 빌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늘 가던 카페에 들른다. 쉬는 기간 동안 왜 그렇게 자주 커피를 사 마셨는지 모르겠다. 열 잔 마시면 한 잔을 주는 쿠폰으로 공짜 커피를 받는다.
왠지 이 커피가 이 시간에 마시는 마지막 커피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에 돌아와 노래를 튼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곧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그 순간 갑자기 마음이 벅차오른다.
오늘 이 기분을 남기고 싶어 오랜만에 노션을 연다. 한두 줄만 적으려고 했는데 문장이 계속 이어진다.
행복하다.
봄 햇살 아래 걷고, 도서관에 들르고, 이렇게 글을 쓰는 이 여유가 좋다.
그동안 나는 늘 시간을 효율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고,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고.
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충만하다.
어쩌면 이런 시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휴직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평범한 하루의 여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