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걸려도 기다리기. 아이는 자라는 중
어쩌다보니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하는 시각이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집까지 25분은 가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가서 저녁을 준비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전화한 둘째 딸. 언제 오느냐부터 시작해서 어두운데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잔소리가 이어진다.
"엄마가 집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남았는데, 네가 밥을 좀 해줄래?"
9살 인생이지만 엄마가 하는 여러 주방일들 중 몇 가지를 할 줄 아는 아이다. 쌀 씻어 밥솥에 넣고 작동시키는 것 쯤이야 여러번 해 본 경력자다. 아이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대신 전화를 끊지 말아 달라고 했다.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해 놓은 것인지 덜거덩 덜거덩, 벅벅, 샥샥, 바가지를 꺼내고 쌀통을 꺼내고 쌀 담고 씻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때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쌀은 몇 컵 해? 두 컵? 세 컵?"
"세 번 정도 씻으면 되지?"
"물은 어디까지 맞추지? 3까지 할까?"
"왼쪽 선? 오른쪽 선?"
"위에 고압으로 돌리고, 압력취사 누르면 되지?"
여러번 했던 터라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계속 모든 과정을 내게 확인했다. 중간중간 내가 어디쯤인지 확인하시면서. 속으로 한 생각, '그냥 내가 집에 가서 하는 게 더 빨랐겠다.' 20여분 정도를 통화하면서 정말 몇 번이나 생각했다. '괜히 시켰다.'
내가 막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까지도 아이와의 통화는 계속 됐다. 집에 거의 다다를때 쯤에는 '엄마 거의 다 왔어. 엄마가 가서 할게.'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올 뻔 했다. 간신히 그 말을 다시 뱃 속으로 삼키고 문 안으로 들어가자, "짠! 방금 취사 눌렀어!" 하고 둘째 딸이 의기양양하게 나를 반겼다.
얼굴에 한껏 미소를 띄우며 정말 고맙다고, 네 덕분에 밥을 빨리 먹을 수 있겠다고 얘기하며 끌어안았다. 그날 저녁 밥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물론 그 날 낮에 일반미보다는 비싼 로컬 유기농 쌀을 새로 샀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밥맛의 모든 공을 둘째에게 돌렸다. 놀랍게도 아이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9년 인생에 몇 번 없는 날이다!
당연히 아이에 비해 어른인 내가 쉽게 빠르게 잘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내가 더 쉽고 빠르게 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해 줄 것인가. 해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재미있겠다고 말할 때, 호기심이 일었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 그리고 시간이 걸려도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이 필요하다. 성격 급한 엄마로서는 두고 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아이를 자꾸 관찰하고 허용하고 기다려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