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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May 15. 2021

노래③

나르시시즘이라 해도 좋아: 내가 부르던 노래의 기억

8
 그곳은 학생 수가 꽤 많은 고등학교였다. 한 학급에 40명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개 학년에 무려 16개 학급이 있는 여학교였다. 그때까지의 나의 경험과 상식이 무색하게, 학생들은 선생님이라는 존재에게 관심이 많았다. 의외였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선생님에게도 팬이 있었다. 두세 명의 학생이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졸졸 쫓아다니던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 기억이 난다. 막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가던 새내기 교사, 새로 부임한 선생님인 내게도 학생들은 관심을 보였다, 정도로 설명한다면 굉장한 겸양이 될 것이다. 생애 이런 순간은 전무후무하리라는 당시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사실이 되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을 향한 여학생들의 장난은 때론 짓궂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이 만족할 만큼 당해주는 척조차 하지 않는,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선생님이었다. 사실 그건 여유가 없다는 방증이었다. 수업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복도에서의 가벼운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수업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경하던 시절이었다. 수업도 처음이고, 출제도 처음이고, 학생 상담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늘 베테랑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자존심이었다. 교사라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얄팍한 밑천이 분명 드러났을 텐데, 학생들은 그런 나를 좋아해 주었다. 자연히 학교 생활은 즐거운 것이 되었다. 책상에는 학생들의 쪽지와 선물이 가득했고, 교무실 밖에는 이유 없이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특별한 것은 '젊음'이요, 사랑받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교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나도 지금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애들이 선생님을 엄청 좋아하긴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엄청 잘생긴 건 아니잖아요." 아이들은 거짓말만큼이나 진실도 명확하게 말했다. 개별 면담 중에 한 학생이 날린 팩폭은 그 말 한 저의를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르지는 않았는데, 그런 걸 굳이, 똑똑히 말해주어 참 고맙구나. 그땐 내가 좀 못생겨서, 하하.


 '신규'와 '젊음'과 '인기'가 이유가 되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교 행사에 자꾸 불려 나갔다.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에서의 3등이 최고 성적인 내가 '체육대회의 마지막 순서인 교사 계주의 마지막 주자'가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감사하게도(?) 내가 바통을 이어받을 무렵에 우리 팀은 이미 반 바퀴나 뒤쳐져 있었고, 이후 며칠 동안 걸을 때마다 근육통에 시달릴 만큼 열심히 뛰었음에도 승패에 조금영향 미치지 못한 채 경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운동장 한구석에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은 패배자 주위학생들이 몰려들어 바글거리는, 그런 식이었다.


 축제는 꽤 어마어마한 행사였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축제의 피날레는 역시나 학생들의 장기자랑 공연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공연에는 반드시 교사들의 특별 무대가 한 순서 이상 포함되어야만 했다. 내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신규'와 '젊음'이 또다시 이유가 되었다. 나의 참여는 필수를 넘어 강제 사항이 된 모양새였다. 저는 정말 춤은 못 추는데요. 차라리 노래를 하면 모를까.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 그들에게는 왜 노래를 하고야 말리라는 나의 바람으로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그렇게 나는, 나보다 열 살 정도는 많다고 생각했던 한문 선생님과, 별다른 친소 관계랄 것도 없이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만 나누어 본 그 분과 듀엣으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선택은 내게 있어 최선의 것이었다. 끝끝내 교사 댄스팀에 남았더라면, 먼저는 헬멧을 쓰고 여고생들의 체육복을 입은 채 '빠빠빠'를 추어야 했을 것이고, 간주 구간이 되면 체육복을 벗어던지고 그 안에 감추어진 망사 스타킹을 드러낸 채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섹시 댄스를 추어야 했을 것이다. 노랗고 파랗던 조잡한 가발은 덤으로. 여장이라니, 망측해라.

 약간의 부연을 하자면, 여고의 남교사 중에는 학생들을 위한 팬서비스를 유독 즐기는 분들이 몇 분 계셨다. 심지어 체육대회니 축제니 하는 행사마다, 물론 학생들의 요청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형식이었겠지만, 여장을 하는 운명에 놓이는 남성들이 있었다. 그 반 아이들은 왜, 우락부락한 외모의 담임 선생님 취향은 일절 고려하지 않은 채 체육대회의 학급 티로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를 선택한 것일까?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그것이 정녕 담임교사의 취향이 아니었다고 볼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엉킨 가발의 머리채를 뒤흔들며, 배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그는 뻣뻣한 웨이브를 참 열심히도 해댔고, 환호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여학생들의 함성을 많이도 이끌어 냈었다.


 대체 학생 축제에 교사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나?


 선곡부터 난관이었다. 가장 선생님 같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선생님으로서의 위신을 가장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색이 축제인데, 분위기 다 죽게 슬픈 발라드를 부를 수도, 교훈을 남기겠다고 건전가요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내가 한 곡을, 듀엣을 하게 된 한문 선생님이 한 곡을 골라 두 곡을 부르는 것으로 무대를 꾸미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고른 곡은 그의 목소리에, 그가 고른 곡은 내 목소리에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분은 연습을 퍽 귀찮아하시는 듯했다. 사전에 함께 맞추어본 시간은 거의 없는 지경이었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연습에서 진을 빼면 본 무대에서 힘들다며 리허설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 안 불러 봐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애써 긴장과 불안을 내리누르며 백스테이지에서 무대의 순서를 기다릴 때까지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빠빠빠 팀의 혼신을 다한 몸부림을 지켜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이고, 망측해라. 여장이라니.


 그의 선곡이 우리의 첫 번째 곡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드라마의 OST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달달한 발라드 곡이었다. 그는 관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뒤의 화면에 드라마 장면을 편집한 영상을 내보내자고 제안했고, 나는 어떠한 그의 제안도 거절하지 않았다. 노래의 시작을 그가 홀로 무대에서 열면, 나는 내가 맡은 소절을 그의 뒤에 이어 부르며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또한 그의 제안이었는데, 아마도 '신규'에 대한 서프라이즈 효과를 노린 듯했다.

 결과는? 그 큰 강당이 이천 명에 가까운 전교생들의 환호성으로 꽉 들어찼다, 정도로 설명한다면 굉장한 겸양이 될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마만큼의 에너지와 열기를 뿜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경험했다. 옛날 사람 티를 좀 내자면, 가수들이 게릴라 콘서트 하면, 안대를 벗어주세요! 하면 막 관객의 함성 소리만 듣고도 울잖아, 그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아, 가수들이 이 맛에 노래하고 이 맛에 콘서트 하는구나. 슬프게도 나는 결코 프로페셔널한 가수가 아니었고, 폭발하는 객석의 열기에 두 번째 곡의 전주를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노래를 시작해야 했다. 덕분에 첫 음을 정확히 잡지 못해, 잠시 주춤거려야 했고, 곡 중간에 원래의 음으로 이상하게 타고 넘어가는 신묘한 재주를 선일 수 있었다.

 두 번째 곡은 나의 선곡이었다. 그 옛날 김광석 아저씨의 곡을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두 젊은이가 엄청난 편곡으로 뒤 바꾸어 놓은 그 노래, 락앤롤 베비. 그리고 그 두 번째 곡에서, 나는 함께 한 그 선생님의 신묘한 노래 솜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쌓고 쌓아 온 둑을 한 번에 터뜨리듯, 찌르는 고음의 락보컬이 뻥 하고 터져 나오며 삽시간에 텐션을 끌어올렸다. 고음불가로 살아온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였다. 덕분에 오히려 조화가 잘 되었다고 해야 할까. 무대삽시간에 끝이 났다. 검은 객석과 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발사되던 환호의 비명을, 내가 겪었던 가장 큰 무대의 그 뜨거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 날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전날 부른 곡의 떼창으로 나를 맞이했다. 멋쩍은 웃음으로 화답하는 수밖에. 그 뒤로 나는, 매년 축제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 듯 무대의 한 순서를 맡았다. 포맷은 늘 새로웠다. 솔로도, 복면가왕도, 밴드도 해 보았다. 상황도 대상도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젊음'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 시간을 내어 썩 대단치 않은 나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사'이기 때문이라는 것. 르시시즘이라 해도 좋아. 그들의 추억 한 자락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도, 쌓여 가는 나만의 이야깃거리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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