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②
나르시시즘이라 해도 좋아: 내가 부르던 노래의 기억
6
나를 움직인 것은 어느 여자 아이의 칭찬이었다.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은 남자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했던가. 편견이 묻어나는 우스개가 기분 나쁘다면 그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정도로 정리해도 좋겠다. 변성기가 지나며 목소리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조금씩, 낮은 목소리에 대한 칭찬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할 것이 그다지 없던, 찌질한 시절이었다.
우린 남학교의 건전한 고등학생들이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교복의 지퍼형 넥타이를 반쯤 내리고는 우르르 일번가로 나섰다. 한낮의 한적한 번화가를 아마겟돈 워킹으로 누비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우선 배를 채워야 했다. 삼천 원이면 넓적한 돈가스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분식집이 먼저였다. 식사 시간은 십 분을 넘기지 않았다. 허겁지겁. 수준급의 맛을 자랑한다……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다시 먹으라고 한다면 굳이 찾아 먹을 정도의 맛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급식보다는 훨씬 나았다. 해방감은 입맛을 돋우는 최고의 애피타이저였다.
우리에겐 늘 시간이 부족했다. 배를 채우면 재빨리 장소를 옮겨야 했다. 노래방이었다. 재정적 여유가 있다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방도 가끔 추가되었다. 그래도 노래방은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수능 전날도 그랬다. 수시 합격생이나 정시 응시생이나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주 가는 노래방은 시설이 구렸다. 얌전하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 구렸다. 어두컴컴한 조명과 탁한 공기로 가득했다. 마이크에서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1시간에 5천 원, 서비스 많이. 목이 쉬어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우리는 항상 초조했다. 화면의 시간이 소멸되고 있었다. 간주 점프, 빨리빨리, 1절만 부르고 취소, 다음, 다음 곡……. 화면의 이용 시간이 끝나기 전에 예약된 곡을 다 불러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마지막 곡은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이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곡들이, 그러니까 길고도 길어서 뽕을 뽑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들이 차지했다. 마지막 곡은 기계의 종료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긴 곡들이 지겨워지면 떼창으로 함께 부르며 남자들의 우정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 선곡되었다. 주말 저녁을 장식한 SG워너비의 노래도 마지막 곡의 단골손님이었다.
우리의 조급함과는 별개로 노래방 데스크는 항상 서비스에 후했다. "20분 추가되었습니다" 절대 한 번에 많은 시간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20분, 20분, 10분, 10분, 감질나는 시간들이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족히 2시간은 부르고 나왔다. 주인아주머니가 혹여나 까먹을까 봐 마이크를 붙잡고 "써비쓰 더 주세요!"를 부르짖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시간이 들어왔다. 평일 낮시간은 인심이 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방은 자아도취의 끝판왕이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의 그것을 충분히 존중했다. 한 명이 마이크를 잡으면, 그것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온전히 그만의 쇼타임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혹여나 실수로 <취소> 버튼이라도 누르게 될까 다음 곡을 예약할 때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나는 슬프게도 고음불가였다.
음역대의 한계로 부를 수 있는 곡이 많지 않았다. 바야흐로 발라드와 알앤비의 시대였다. 미성의 발라더들은 감히 넘볼 수 없었다. SG워너비의 소몰이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소몰이와는 거리가 먼 듀오였지만, 음악의 지향점이 분명히 있어 보이는 그룹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찾아 듣는 노래의 기준이 점점 '내가 부를 수 있는가'에 맞춰지고 있었다.
동시에 서정적인 랩발라드의 시대이기도 했다. 월드 스타 싸이도 금지된 이름 엠씨몽도 엠씨스나이퍼도 조피디도 김진표도 그런 류의 노래들이 하나씩은 있었다. 내 친구는 아직 그녈 사랑했고 우울한 오후 사랑의 질투는 실수를 연발, 아직 못다 한 내 얘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알러뷰 오 땡큐이며, 친구의 세월이 많이 변했고 이젠 늙어간다는 말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게 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또다시 흘러가 버렸다는, 그런 가사들을 나는 줄줄줄 외워나갔다. 그런 것들을 씨부리다보면 숨이 몹시 찼는데, 그럼에도 발음을 뭉개지 않고 리듬에 맞춰 읊조리는 능력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아카펠라 덕분인지 폐활량은 좋은 편이었고, 낮은 톤의 목소리는 이럴 때에 꽤나 유효했다. (그래 봤자 남자아이들이었지만) 목소리 좋다 멋있다 칭찬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목소리가 좋으니까 <끝이 아니기를> 부르면 멋있을 것 같다고, 모르는 곡이라면 연습해서 들려달라고
놀이기구의 차례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쫑알대던 그때에, 새로운 과제가 그렇게 나타났다. 모르는 노래였지만, 더는 모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노래들.
7
듣고 싶은 노래 한 곡 듣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고 또 몹시 소중한 일임을, 머리를 박박 깎고서야 알게 되었다. 허공에 대고 혼자 부르는 노랫소리에 감동하여 눈물짓는 일이 제정신으로 할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가사를 외우는 것이 매우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눈을 감으면 전주 마디의 악기 소리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될 지경이었다.
군 내부의 인트라넷으로 접속 가능한 라디오 채널이 있었다. 방송 1회분에 5-6곡 정도를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의 다시 듣기 서비스는 연결이 불안정해 자주 끊어졌지만, 일과 시간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만 원하는 곡을 찾아 들을 수는 없었다. 게시판에서 제공하는 정보라고는 몇 회 분의 방송인지, 그것이 송출된 날짜가 언제인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장소였고, 같은 고민을 나누는 전우들은 여럿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시간도 많고 능력은 더욱 뛰어난 행정병들은 방송마다 등장하는 곡명을 일일이 체크하여 날짜순으로 데이터베이스화 시켜 놓고는, 온라인 세상의 숭고한 가치 중 하나인 '공유' 정신에 입각하야 그 결과물을 아낌없이 게시판에 올려놓곤 했다. 이것만 있으면 온라인 음악 감상 서비스가 바로 내 것이었다. 뜨거운 전우애를 느끼며, 기억 속의 노래를 하나씩 검색해서 찾아 들을 수 있었다.
학생 시절 일번가의 노래방보다 더욱 구렸지만, 부대 내에는 코인 노래방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노래방을, 한 달에 한 번은 부대 내 성당에서 틀어 주는 영화 관람을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의 최선이었다. 생활관의 TV에서는 아침저녁으로 걸그룹의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내가 아는 한 군대는 지상파 3사와 케이블 채널의 가요 프로그램을 요일별로 돌려가며 빠짐없이 시청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소녀시대의 <Gee>를 보기 위해 모두가 티비 앞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들 뒤에 멀리 떨어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펼쳐 들었다. 두 키를 내리면, 김동률의 <이제서야>를 무리 없이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낡은 테잎 속의 노래를 듣듯 <오래된 노래>의 가사에도 빠져들었다. 김동률의 노래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소화할 수 있는 노래의 폭이 넓어졌다. 후렴 부분에서 고음부가 연이어 이어지는 곡들은 나의 저주받은 성대가 감히 감당해 낼 수 없었지만, 오히려 롤러코스터를 타듯 저음부와 고음부를 오가는 복잡한 구성이 부르기에 즐겁게 느껴졌는데, 김동률의 노래가 그런 것들이 많았다. 부대 내의 코인 노래방은 노래 실력의 연마 장소로 삼기에 더없이 좋았다. 국방부의 시계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