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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Apr 18. 2021

노래①

나르시시즘이라 해도 좋아: 내가 부르던 노래의 기억

1

 모처럼 집에서 보낸 주말 저녁이었다. 집 밖에서의 시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생각과는 별개로, 어느새 집 밖을 도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오랜만에 텔레비전 앞에 앉게 되었는데, 와, SG워너비였다. 그들의 열창과 함께 스멀스멀 추억이 소환되었다. 힘겹던 애창곡이자, 내 플레이리스트를 거의 가득 채우던 노래들.


2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주일학교에서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를 때면, 그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크게 소리를 내기 위해 목청을 돋우곤 했다. 경쟁이 붙은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제치고 나의 귀가 내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야 직성이 풀렸다. 아직도 이름이 또렷이 기억나던 그 녀석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처음으로 가요를 듣기 시작한 것은 6학년 수학여행의 버스 안이었다. 학급에서 회장인가를 맡았었는데, 아이들인지 선생님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요청으로 이동하는 버스의 통로에 서서 마이크를 들어야 했다. 노래자랑의 첫 번째 테이프를 끊는 것은 사회자의 몫이었다. 당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공중파에서 방영하던 애니메이션의 OST 뿐이었다. 당시에는 OST 같은 용어도 물론 알지 못했고, 애니메이션의 시작과 끝에 들어가는 노래들이 박상민이나 윤도현 같은 가수들이 부른 것인지도 역시 알지 못했다. 그래도 동요 같던 옛날 만화 주제가보다는 훨씬 멋있다고 느끼던 노래들이었다.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다.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는, 만족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듣던 노래는 조금 달랐다.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는 달리는 버스의 스피커에서는 친구들이 가져온 각종 가요 테이프들의 노래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H.O.T. 의 노래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단어를 이런 용례로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나는 여섯 시마다 TV 앞에 앉아 그저 만화 시간을 기다리는 낙으로 살던 '순수한' 어린이였고, 그런 내게 화재 사고로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가사를 담고 있다는 그 노래는 무언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뉴스에서 보아야 할 내용으로 대중가요를 만들었다는 점이 우선 충격적이었고,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부분 부분은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광팬인 여자 아이들의 요청으로 버스 안에서 족히 서너 번은 반복해서 들은 탓인지, 나중에는 웅얼웅얼 따라 할 정도가 되었다. 경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던 내가 수학여행에서 배운 것은 정작 그런 것이었다.


3

 음악 시간의 가창 수행평가는 긴장이 넘쳤다. 그때의 나는 유독 떨었다. 중학교는 무서운 곳이었다. 미친 각도의 언덕을 넘어야 정문이 보이는 산속의 남학교. 같은 재단 소속의 고등학교 선배들도 무서웠고, 다양한 몽둥이를 전사의 무기처럼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선생님들은 더욱 무서웠다. 종례 시간에 무얼 잘못하였는지, 도덕 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옆 반 아이들은 담임의 말 한마디에 속옷 하의만 입은 채로 복도를 질주했다. 맨몸의 아이들이 옥상에 집합하여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올려다보며 낄낄대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일이 아닐 때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문 선생님의 몽둥이질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었기에, 다정하게 말하는 그 앞에 불러가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달달 떨었다. 처음 교복을 입고 내가 바라본 세상은 작은 군대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사각 테의 안경과 멜빵을 꼭 착용하던 곱슬머리의 음악 선생님은 독특한 사람이었다. 성악을 전공하고 단소 불기에 심취한 그는 까까머리의 1학년생들의 첫 번째 수행평가로 가창 시험을 선택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가곡 1절 전체를 선생님의 반주에 맞추어 부르게 했다. 차례가 다가왔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꽤나 애를 써야 했다. 노래가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음악 선생님이 박수를 쳤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박수를 치게 했다. 나의 노래에 감동했다고 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극찬의 레퍼토리를 한참 늘어놓았다. 다만 감동했다는 표현만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모든 학생들의 가창 순서가 끝나자, 내게 앙코르를 요청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두 번째 불렀을 때는 처음만큼 잘하지는 못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 선생님의 인정은 다른 학생들의 인정으로도 이어졌다. 노래할 일이 있으면 앞에 서게 되었다. 소심했던 성격 탓에 이후에도 밴드부 보컬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학급 대항 합창대회는 이야기가 달랐다. 가창 시험으로부터 한 학기 정도가 지나서였다. 솔로 파트를 맡았는데, 본 무대에서 '삑사리'가 났다. 음이탈이라는 말로는 그 어감이 다 전해지지 않는, 그야말로 '삑사리'였다. 손꼽히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그렇게 변성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4

 아버지는 과묵하고 말이 없었다. 지금과는 딴 판이었는데, 아마도 그땐 아버지도 아버지가 처음이었기에, 그저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탓으로 여긴다. 그런 아버지가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사 왔다. 비싼 것 같은데. 사달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별다른 설명도 없이 요란하게 큰 박스가 내 방에 놓여 있었다. 덕분에 무슨 생각으로 이걸 오신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맨질맨질 고급스러운 은색 표면의 촉감이 좋았다. 일본 전자 회사의 것을 흉내 낸 국내 기업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가요 음반을 구입하였다. 당연히 카세트테이프로 된 것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 전까지의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영화를 보았다. 딱히 수업 준비를 해 오지 않은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가져온 비디오를 틀도록 내버려 두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마흔 명의 남학생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엽기적인' 청춘 멜로물의 영화를 보는 모습은 지금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영화의 삽입곡에까지 설렘을 느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저히 그 한 곡을 듣기 위해서, 그 곡이 보너스 트랙으로 실린 대형 발라드 가수의 8집 정규 앨범을 구입했다. 그댄 곁에 없지만, 이대로 이별은 아니겠죠. 마침내는 테이프가 늘어져 들을 수 없게 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어딜 가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헝겊 파우치 안에 건전지와 연결 단자까지 주섬주섬 챙겨서는 들고 다녔다.

 교회 중등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오대오 가르마를 한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을 많이 따른 적이 있었다. 중학생 남자애들과, 그때는 선생님이라 불렀던 그 형과 함께 일번가에서 밥을 먹고 생전 처음으로 노래방이라는 곳에 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대라는 걸 알기에, 난 믿고 있기에. 이제 더는 만화 주제가를 부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두툼한 책을 뒤적거려 그 곡의 번호를 찾아 입력하고는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 미성을 가진, 그 대형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나는 결코 부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플레이어에 연결된 이어폰에서는 감미롭고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내 입에서는 두꺼비 같은 소리가 났다. 목소리가 한없이 가라앉던 시절이었다.


5

 언덕이 버겁던 산속 남학교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농구를 하고 있으면 우리 공을 빼앗아 멀리 던져 버리던 고등학생 선배들을 참 미웠었는데, 이젠 농구 코트의 한쪽에서 걸리적거리는 조무래기 중학생들이 귀찮아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신문부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나만 보기 좋게 똑 떨어졌다. 입학 성적으로 전교 1, 2, 3등이 다 신문부를 지원했는데, 왜 2등만 떨어트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실망이 커서 다른 동아리 가입은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학기가 절반 정도 지나서 절친한 친구의 소개로 한 아카펠라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의 선생님들도 여전히 각종 몽둥이를 자랑스럽게 들고 다녔지만, 그 학교는 설립 이념에 따라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미션 스쿨이었다. '선교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3개의 종교 관련 동아리 중 남성 4부 아카펠라라는 특징으로 유명한 동아리였다.

 입부 오디션에서, 어느 파트를 하고 싶냐는 선배의 질문에 당연히 '메인 테너'라고 답했다. '베이스-바리톤-메인 테너-하이 테너'로 4부의 파트를 구분해 놓고 있었는데, 혼성 4부로 치면 각각 순서대로 '베이스-알토-소프라노-테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밀려서 오게 된 동아리에서까지 화음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메인 테너는 어쨌든 주 멜로디를 담당하는 파트였으니까. 선배는 내게 피아노 스케일을 따라 발성을 시켜보더니, 2옥타브 미 음정도 불안하다며 바리톤 파트로 배정해버렸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곧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아카펠라는 묘하게 재미가 있었다. 부족한 음감을 화음부 멜로디를 반복해서 외우는 것으로 커버해 나갔다. 열심히 활동했다. 연습을 하겠노라며 해가 저물어가는 운동장에서, 스무 명의 남학생들이 거리를 벌리고 큰 원을 그리고 서서는 무반주로 노래를 하던 장면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다. 하지만 중저음을 크고 분명하게 내는 것에 오래도록 집중한 나머지, '고음불가'가 되어 버린 것은 지금도 안타까운 일이다. 글쎄, 변성기를 지나며 갖춰진 음역대의 문제를 지금까지 아카펠라 파트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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