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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an 28. 2020

역사 앞에 선 무력한 개인의 표상

<마지막 황제> 리뷰: 아이신지로 부의 이야기(1987)


어떤 즉위식

 금빛 의자 위에 한 아이가 앉아있다. 공중에 붕 들려 있는 두 다리, 꼬마 혼자 차지하고 앉기에 의자는 크기만 하다. 높은 단 위의 의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꼬마는 이내 심심해다. 자리 위에 올라서 양 손을 파닥파닥, 장난을 쳐보지만 이내 제지당한다. “곧 끝날 겁니다.” 숭고한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듯, 꼬마의 아버지는 아차 싶어 고개를 숙인다.
 문득 아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저길 봐!” 펄럭거리는 누런 천이 얼른거린다. 꼬마는 미련 없이 지루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발 한발 내려서기 시작한다. 누런 천 반대편으로 파고들어오는 빛이 그의 목표다. 짧은 보폭으로 열심히 내달리니 거대한 천이 스르르 올라가며 꼬마의 눈앞에 거대한 궁전의 위용이 가득 들어온다.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에 맞춰 꼬마를 향해 무릎을 꿇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람들……. 꼬마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계속한다. 세 살의 어린 황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의 즉위식 풍경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의 표상


 누구에게나 ‘마지막’이라는 것은 원인 모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그 순간, ‘끝’이 갖는 아쉬움과 회한의 감정은 극대화된다. 영화의 이 장면, 천진난만한 꼬마 황제의 등극식이 더 쓸쓸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른 채, 앞으로 닥쳐올 시련과 고난의 한가운데 자리로 나아가는 장난스러운 꼬마의 얼굴, 그래서 이 장면이 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말의 명화인지 토요명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시그널 음악 중 삽입되어 흘러 지났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황제」는 풍부하고 뛰어난 미학을 가진 작품이다. 작품, 감독, 각본 등 아카데미에서 아홉 개 부분을 수상한 수작(秀作)이라는 사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비록 영화에 대해서 월등한 안목을 갖추지 못하였더라도, 이것이 훌륭한 영화임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지막 황제 아이신지로 부의의 일생을 따라가는 이야기 구조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장소에 따라 옮겨가는 색감과 영상, 시각적 효과 역시 뛰어나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지나간 이후에도 인생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기는 작품인 것이다.
 ‘청 황제 부의’라는 특수한 상황 특수한 인물을 내세웠지만, 영화는 그것을 보편성으로 치환해낸다. 부의는 전체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을 대표한다. 찬란한 자금성에서 다수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가 황제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이라는 것을, 비극을 마주한 부의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명색이 황제인 그는, 그러나 원하는 대로 으로 되돌아 갈 수도, 사랑하는 유모와 함께 지낼 수도 없는 존재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길은 거대한 철문으로 가로막힌다. 궁 밖의 세상은 다른 지도자가 다스렸다. 그나마 그의 지도력이 미친다는 궁에서조차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부패한 환관들을 향한 개혁의 칼날도 잿더미 앞에서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감옥 같은 자금성에서 강제로 쫓겨나지만 그의 삶은 또 다른 공간 속에 갇혀버린다. 천진에서의 호화 생활은 사랑했던 두 부인을 앗아가 버렸다. 지위 회복을 위한 그의 야심은 그 자신을 만주국으로 이끌지만 다시 황제가 된 그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그에게 만주는 또 하나의 자금성이었다. 일본 패망 이후 부의는 일제에 협력한 전범으로 몰려 형무소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는 민간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부의를 황위 계승자로 임명한 자희태후(慈禧太后), 부의에게 서양의 문물을 소개해 주며 그를 신사로 만들고자 했던 선생 존 스톤, 부의를 만주국의 황제가 되게끔 지시한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 그리고 부의가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그를 훈련시키는 교도소장, 이들 모두 부의가 사회와 역사의 변화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자금성, 천진, 만주, 형무소의 모든 배경은 사방이 가로막힌 채 개인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황제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어린 부의를 권력욕에 물들게 한 것은 황제라는 지위였으며, 그 지위를 유지하길 원했던 부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중국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동생의 말 한마디였다. 세상은 부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으며 살아남고 싶으면 변화하라고 요구다. 그럼에도 정원사 부의는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추억한다. 개인과 사회의 투쟁 구도 속에서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쓸한 개인의 초상이다.

 



역사 속의 선통제 부의 


 영화는 ‘부의’라는 실존 인물을 그 정면에 내세운다. 실제로 부의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토대로 제작되었다고 밝히며 그 신뢰도를 높인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주요 대사를 모두 영어로 처리하는 등, 전적으로 서양인의 손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인들의 신비와 왜곡의 냄새를 지우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실제의 부의는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맛본 부와 권력에 중독되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했으며 오직 그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변 인물들과 민족을 팔아버리기다. 약물중독과 낭비벽에 시달렸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의 부의는 인간적인 고뇌에 사로잡힌 불행한 황제로 묘사되며, 부정적인 모습들은 상당 부분 삭제되다.
 선통제 부의는 청나라 12 황제 중에서 유일하게 ‘등극―퇴위―복벽’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황제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부의가 황제의 지위에 올라 있던 시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손문이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한 것은 선통 3년이었다. 신해혁명의 결과, 청 황실 명의의 황제 퇴위 조서가 반포된다. 거인(擧人) 양정동이 집필한 조서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와 황제께서 물러나 평안하고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국민의 대우와 예우를 받고 정치가 더없이 잘 다스려지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어찌 의지를 내리지 아니하겠는가!"


 그렇다고 부의가 황위에서 아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대청황제는 퇴위 이후에도 존호를 계속 사용할 수 있었으며 매년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백은 400만 냥을 지원받아 사용할 수 있었다. 친위대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내관들을 계속 부릴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부의가 중화민국의 성립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금성 내에서는 실질적으로 황제로 군림할 수 있는 위치였기에 영화와 같은 설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퇴위한 황제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로 성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그 앞날이 썩 푸르지 못했다. 신해혁명의 결실은 군벌 원세개에게 도둑맞아버렸으며 그의 사후 구심점을 잃어버린 새 정부는 대통령과 내각 총리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등 그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부원지쟁(府院之爭, 총통부와 자정원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대통령 여원홍은 장훈(張勛)이라는 장수를 북경으로 불러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장훈은 청 황실에 대단한 충성심을 가진 자였는데, 그러한 충성의 표현은 그 부하들에게 변발을 자르지 못하게 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이끄는 군대는 변자군(辮子軍)이 되었다. 아무튼 ‘부원지쟁’의 조정자로 자처한 그가 북경으로 들어온 것은 1917년, 장훈은 새 정부 대통령의 요청보다는 선통제 부의에게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 장훈은 황제 복벽 계획을 세우고 부의를 알현하기에 이른다. 부의는 자서전에서 그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한다.

 

정사복벽 이후의 14살의 실제 부의의 사진(좌)과 만주국 황제로 즉위한 부의의 실제 모습(우)
양심전에 나가서 장훈을 접견했다. 장훈은 ‘공화정은 우리의 국정에 맞지 않으니 오직 황제폐하께서 복위하셔야만 만백성이 구출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나이가 어려 그 중임을 수행할 수 없소이다.’ 그러자 장훈은 강희제가 8세에 황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말했다. ‘사정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 되겠네요.’


정사(丁巳)년에 이루어졌기에 정사복벽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그러나 장훈의 군대가 궤멸당함과 함께 12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궐에 폭탄이 투하되어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였다. 14살의 부의는 두 번째 퇴위 조서를 작성하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부의의 존재 자체가 구시대의 산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부의를 대궐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은 변발 머리 하나를 남겨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에는 싹 빠져있는 대목이다. 1924년 대포 포격의 위협 아래 대궐에서 벗어나 그의 출생지로 향한다. “난 여기 안 앉아. 집에 갈래! 집에 가겠단 말야!” 태화전에서 즉위할 당시 어린 부의의 고함 대청제국의 불길한 징조라고 수군거렸던 사람들의 말이 정확하게 실현 것이다.



 


역사와 영화의 만남, 팩션(Faction)


 부의에게 청나라 멸망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는 너무 어렸고 황제라는 이름뿐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공과에 대한 시비가 어렵다는 점은 커다란 창작의 자유라는 이점을 허락한다. 전근대의 상징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황제라는 위치, 누구나 공감 가능한 인간적인 모습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역사적 평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까지, 마지막 황제 아이신지로 부의는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기에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유럽의 영화 기술자들이 자금성에 들어가 이 영화를 찍을 때, 중국 당국은 문화재급의 진품들을 그대로 내놓았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한 황궁 안팎의 모습과 여러 집기들이 대부분 조야한 소품이 아니라 진품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중국에 퍼져 들어간 이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 영화에서나마 진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혹여 무언가 놓친 것이 없을까, 소품 하나하나 눈여겨 다시금 살펴보아야겠다. 어떤 것이 국보급 문화재인가,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있을까?

 


참고문헌


박태식, 『영화는 세상의 암호』, 늘봄, 2004.
엔 총니엔, 장성천 역, 『대청제국 12군주열전 下』, 서울:산수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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