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Jan 26. 2020

흔해 빠진 이들의 이야기

1987년, 장이머우 감독, <붉은 수수밭> 리뷰

  “1944년 11월에 나는 이광수와 함께 남경에서 열리는 문학자 대회에 갔었습니다. …… 소주(蘇州)에서 내려가지고 소주 일본군 사령부를 일행 40여 명이 방문했었습니다. …… 그는 50이 넘어 보이는 소좌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이 지금 지나 대륙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점'과 '선'뿐입니다. 천진, 북경, 서주, 남경, 상해……이 같은 점들을 연결하고 있는 선만은 일본군이 가지고 있습니다. 점과 선을 연결하는 철도선의 좌우 5마일 밖에서부터는 이것은 일본군의 점령 지대가 아닙니다. 여기는 왕정위(王精衛) 정권도 미치지 못하고, 장개석 정권도 미치지 못하고, 오직 팔로군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들은……지나 공산당은 일정한 방침 밑에 구체적 설계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 설계 밑에서 조직적 실천을 합니다. 여기에는 장개석도 왕정위도 일본군도 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바로 이것입니다.”


  1951년 여름, 비평가 팔봉(八峰) 김기진이 참모총장과 문사들 앞에서 한 말이다. 친일문학인이었던 그는 일제가 ‘대동아 공영권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조직한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들은 전황 보고를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당시, 공산당의 군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이야기였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참모총장은 이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라는 사람들 중 친일파가 다수였다는 한탄 살짝 접어두,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전개 과정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승전을 거듭하며 중국 대륙 깊숙이 세를 불렸던 일본, 전쟁의 끝 지점에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지배한 것은 대륙의 ‘점’과 ‘선’ 뿐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어려움의 원인을 ‘지나 공산당의 구체적인 설계’ 탓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 역시 그러했을까? 조직, 훈련, 장비 면에서 철저히 열세였던 그들이 8년간의 싸움을 버텨내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 「붉은 수수밭」 내내 ‘중국의 힘’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아니, 그것은 ‘민중의 힘’이라고 이야기해야 합당할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민중의 힘’에 대해 이야기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이 많은 영감에게 노새 한 마리에 팔려가는 젊은 여인이 있다. 나이 많은 영감은 문둥병자이기까지 하다. 시집가는 가마를 뒤집을 듯 흔들어대는 가마꾼들의 장난이 아니어도 대성통곡할 이유는 충분하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여성들은 희생양이 되곤 했으니까. 사내만 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 많은 여성들이 집안의 빚을 갚는 수단으로 팔리듯 시집을 갔다. 실상 매매혼이었다. 여주인공 추알의 처지도 같았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시작은 흔 옛이야기의 한 구절과 같다. 그녀가 원치 않는 혼처에 제 아비의 밥상을 뒤엎는 강인한 여성이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시집을 가기가 무섭게 문둥이 남편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행운을 맞이한 추알은 술도가의 CEO 자리를 물려받는다. 양조장의 최고 책임자 격인 라오한을 비롯한 다른 일꾼들 모두 그녀를 잘 따르고, 그들과 같은 처지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한 추알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재료가 조금 의심스럽지만) 역대 최상의 맛을 자랑하는 술도 빚는다. 그러나 잘 나가는 여성 CEO의 성공 스토리라는 심심한 결말은 이내 방향을 급선회한다. 잔학한 일본군인들의 침이 이들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일본군과의 ‘붉은 전쟁’을 향해 달려 나간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들이 있다. 신랑에게로 가는 길, 신부를 태운 가마가 ‘속사포 박’을 사칭하는 한 인물을 만난다. 가짜 총을 가진, 말라비틀어진 남자의 정체를 알고 보면 겁을 집어먹고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전대를 풀어놓는 우람한 가마꾼들의 모습 우습다. 재빨리 돈을 챙겨 달아났어야 했는데, 신부에게 관심을 보이고 시간을 끌다가 틈을 허락한 가짜는 결국 다수의 가마꾼들 발길질에 압사(壓死)당하고 만다. 분수에도 없는 강도짓을 했던(혹은 해야만 했던) 그는 아마도, 과도한 수탈 땅을 빼앗긴 소작농은 아니었을까? 무모한 일을 벌이면서까지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그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는 점 만은 자명하다.
 

  진짜 ‘속사포 박’은 총 한 자루 들고 덩치 큰 사내들을 이끌고 다니며 납치를 일삼고 쇠고기를 독차지하는 욕심 사나운 사내다. 동족에게 골칫덩이였던 그는 그러나 의적(義賊)과 같은 모습으로 일본 저항하다 끌려 온다. 김동인의 「붉은 산」‘삵’이 연상되는 인물이다. 푸줏간 부자(父子)는 또 어떠한가. 그들은 ‘속사포 박’에게 고스란히 쇠고기를 가져다 바치고 그들의 보호를 바라는 소생산자(小生産者), 나약한 프티 부르주아 계급이다. 말없이 투박한 칼질로 소의 각을 뜨던 그들의 실력은 새로운 침략자 일제를 위해서도 고스란히 발휘된다. 어디까지나 편히 먹고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죽을 벗겨내라는 명령은 분명 무리였다. 저들 자신의 안위가 먼저인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금수가 될 수는 없는 법, “엿이나 먹어라, 일본 놈들아!” 하는 외마디 저항과 함께 몸에 몇 개의 커다란 구멍을 새기고 마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라오한이 있었다. 최고의 술을 만들고자 애쓰는 그에게서는  장인정신마저 느껴진다. 끝까지 ‘주인님’이라는 칭호를 빼놓지 않을 만큼 추알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각별했다. 조용히 종적을 감추었던 그가 돌아온 것은 9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서였다. 일제는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며 가죽을 벗겨 잔인하게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그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9년의 세월의 공백 동안, 항일활동을 전개했었을 그가 실제로 공산당에 가담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의 비참한 죽음은 추알과 양조장 일꾼들 마음에 불을 지를 뿐이다.
  사람 키보다 높이 솟아 있는 수수밭을 제거하고 길을 내어 군수물자를 운송하려던 일제의 계획은 양조장 일꾼들의 폭탄 테러와 추알의 희생으로 손실을 입는다.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편안하게 살기 위해, 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세월과 권력의 향방따라 머리를 조아린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방관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삶의 자리에서 그러하였듯, 무능하고 무력하게, 그러나 조용히 분노를 불태운다. 흙 속에 파묻힌 시신들, 일식과 코로나, 그리고 타는 듯한 붉은 수수밭의 모습은 격동적이다. 힘이 있다.



내가 하려는 얘기가 있어
나의 조부모들에 관한 얘기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분들에 대해 얘길 하지만
어떠한 사람도 더 이상 그 얘기를 믿지 않아



  이 이야기는 ‘나’의 조부모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의 조부모들에 대한 흔한 이야기이다. 흔한 이들의 특수한 이야기가 된다. 언제고 반복될, 전설이 될 수 없는 이야기들.
  일제는 다 이긴 줄 만 알았던 전쟁에서 패망하고 저희 섬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패전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끝끝내 그들의 학살과 만행으로 숨죽인 분노를 쌓아가고 있는 민중의 존재를, 그들의 힘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각지에서 벌어지는 저항을 공산당 팔로군의 ‘조직적인 실천’으로 파악했을 뿐이다. 그렇게 각하는 편이 받아들이기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민중은 공산당의 사상이 훌륭한지 어떤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정치가도, 선동가도 아니다. 그저 ‘술 잘 빚는 장인’ 일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공산주의자’의 탈을 씌운 것이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사실, 일제는 그것을 간과했고 그들은 패했다. 국민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하는, 「태백산맥」의 역설적인 한 마디에 담긴 진실이다.





 몇 년째 담임하는 학급의 급훈이 되어 온 사진이 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으로 유명해지기 한참 전부터, 1년의 수업을 시작하는 첫 시간에 반드시 사용되는 사진이기도 하다.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조치에 반발하여서, 한반도 전역이 의병으로 들끓었다. 영국 기자 매켄지가 찍은 이 사진 한 장은, 당시 그들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달해 주는 귀중한 증거가 된다. 기자는 이들과 짧은 인터뷰를 하였고, 고맙게도 이 내용까지 잘 기록하여 놓았다. 아침에도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고, 또 싸우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그들의 말에, 사진을 찍으며 기자가 묻는다. "일본군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나요?"


 "아뇨, 우리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병력도, 화력도, 훈련도 우리가 모두 열세인 걸요." 전투에 나가는 그들이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영문 모를 대답에 기자는 질문을 덧붙인다. "죽을 게 뻔한 전투를 지속하다니요? 이유가 뭡니까?" 고등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하기 어려운 그들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놀라운 대답을 남긴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는 삶과 죽음의 이유를 이토록 간명하게 나타낸 대답을 어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된다.

  역사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에, 이러한 삶을 살았던 이름 모를 이들의 삶이 셀 수 없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다. 그렇게 나는, 경탄의 마음으로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투란도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