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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Mar 14. 2020

벚꽃 새해

*


  내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고 말해줘. 죽음 뒤의 적막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 영화 <몽중인> 중에서. 김연수의 <벚꽃 새해>에서 재인용.



**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나는 어떠한 예견을 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것은 희망도 절망도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둔하기 그지없는 인사의, 그러나 모처럼 정확한 상황 판단이었던 것이다. 인사동의 골목을 누비며, 목이 잘린 불상 앞에 서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아내를 그리워하는 어느 늙은이의 이야기와 함께, 나는 속삭이듯 문장을 읽어 내려갔고, 조각조각 다지고 뭉개진 말들은 전파를 타고 천리 밖을 헤매었을 테지만, 그러나 결국은 네게 닿았을 것이고, 이로서 음절 위에 문장 위에 낮은 음성 위에 매달린 작은 감정들이 저마다 낙하산을 펴고 착지에 성공하여 마침내는 그렇게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만, 그랬다, 또 결국에는 문장을 마치지 못했고, 전파는 끊어져 버렸고, 또 그렇게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아, 고 작은 녀석들은 모두 짧은 비명과 함께 터져버렸고, 심중의 속삭임은 끝내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끝끝내는

  그것이 작은 노력이었다는 사실마저도



***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

  소리 죽여 다시금 읽어 내려갔음에도, 결말이 흐릿하여 또다시 페이지를 펼쳐들 수밖에 없는 것은, 어둠이 자욱이 내린 교정 위에 발소리만 공명하는 텅 빈 복도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까닭인지, 공을 차는 아이들의 소리가 작은 숨을 쌕쌕 몰아쉬는 다문 입술이 희미한 밭은기침 소리가 한데 뒤엉킨 적막 때문인지, 보고 듣고 또 생각하였음에도 차마 뱉어낼 수 없는 어리석은 말들 때문은 또 아닌지. 찬 바람에 길은 또 얼어붙고, 모처럼 맑았던 하늘과 문득 차가워지는 저녁 공기를 마주하고서 제자리를 맴도는 하염없는 산책을, 산책의 즐거움을.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 첫 번째 단편 <벚꽃 새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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