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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Feb 10. 2020

이런 종류의 여행

1. 긴 글이 될 것 같다. 정리를 위해 번호를 붙인다. 끝까지 읽을 게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마시길. 어느 하루에 대한 기록이다. 굳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다양한 상상이 덧붙여질 이야기의 재료로 삼기 위함이다.

2. 먼 길을 떠나기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이틀 전의 체육대회가 문제였다. 배드민턴 복식경기를 뛰었는데, 준비 운동 없이 무리한 탓이었다. 의외로 게임은 잘 풀렸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과 한 조가 되었다. 나름대로 '환상의 복식조'였다. 나는 코트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상대의 스트로크를 정신없이 받아내었고, 파트너 선생님은 기회를 잡을 때마다 폭풍 같은 스매시를 상대편 코드 구석으로 꽂아 넣곤 했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내다 꽂히는 셔틀 콕의 궤적이 미사일과 같았다. 곰과 같이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던 선생님의 평소 모습과 지긋한 연세, 그리고 허리둘레를 생각하면 자못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경기는 완승. (처음에 엄청 빼서 그렇지 막상 돌입하면 목숨 걸고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그러나 헌신적인 경기 덕에 잔뜩 놀란 근육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허리와 다리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이 몸을 이끌고 오르내린 계단이 도대체 몇 개야, 오늘.

3. 마땅한 계획은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하는 오르세 미술관전을 가겠노라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첫 번째 목적지로 그곳을 정했으나, 마땅한 동선이 나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변경할 의향이 있었다. 용산에 가면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하게 될 것이기에, 처음에는 과천 향교도 선택지에 들어가 있었다.(걷는 코스가 너무 많아 결국은 배제되었다)



  오전에 집을 나서 그간 밀렸던 은행일을 보았다. 오늘의 여정을 위한 준비물은 책 한 권과 음악을 듣기 위한 헤드폰이 전부였다. 김연수의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가방에 넣었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빌려다 한 번 읽었던 책이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읽어보고자 구입해 놓은 것이었다. 작가가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은 책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괜스레 더 좋아졌. 가방에 좋아하는 책을 한 권 넣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마음이 든든 편. 여분의 휴대폰 배터리에 충전이 완료되지 않아 챙기지 못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현재 휴대폰의 충전율이 91퍼센트를 가리키고 있으니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은행에 들어가 [대기인수:3명]이라고 찍힌 번호표를 뽑았다. 징검다리 연휴지만 평일이었으므로 어디를 가도 그다지 북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목적지로 오르세 미술관전이 굳어졌다.

4. 이동하는 길에 오늘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이내 답이 왔다. 안부를 물으며 여자 친구 어쩌고 하기에 농담 삼아 '짝사랑 중'이라 메시지를 보냈더니 기대했던 대로 회신이 왔다. '짝사랑이라니. 낭만적이네' 조만간 얼굴을 보자며 만날 기약을 하는데 문득 녀석에게 미안한 일이 떠올랐다. 사죄할 것이 있다고 했더니


  '요절한 잭 스페로우 말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어 온다. 일전의 그가 남긴 글이 떠올랐다.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는 내가 해적 영화의 선장을 닮았다고 말하며 내 주변에서 누군가 요절한다면 그건 당연히 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의 글을 읽으며 누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다 했구나 싶었는데 그게 내가 한 말이었단다. 별 말을 다 했었다. 다만 그는 그 표현이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사죄할 일을 끝내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최근의 소설에서 그를 모델로 인물을 창조했고, 내 소설 속의 그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덮이기 이전에 생명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전 같았으면 나의 글을 진작 그에게 보였겠으나, 허락도 없이 친구를 죽인 것이 마음에 걸려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다음번 만나게 되면 그가 등장한 대목을 출력하여 가져다 줄 작정이었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폰에서 흘러나온 노랫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라는 무수한 고백. 어떤 사람은 노래가 되어 남곤 한다. 노래를 들으며 아직도 짝사랑이 낭만이라 여기는 그를 생각했다. 노랫말과는 다르게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었다.

5.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다. 한문학과 사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교직을 이수한 친구로부터 곧 면접에 들어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를 위해 짧게 기도했다. 지난번 왔을 때는 공사 중이었는데, 이촌역에서부터 박물관까지 지하 통로가 뚫려 있었다. 기대와 다르게 사람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과 아주머니들이 많이 보였다. 티켓을 발권한 이후에도 은행에서처럼 번호표를 뽑아 기다려야 했다. 입장을 기다리며 음성 해설을 들려주는 오디오 기기를 빌렸다. 주어진 해설에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감상을 추구하는 편인데, 해설을 듣지 않으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칠 것만 같은 기분에 긴 줄을 기다렸다. 한 손에 오디오 기기를 든 채로 지갑과 발권한 티켓과 번호표를 챙기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웬 꼬마 아가씨가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하고 앙증맞게 말을 걸어왔다. "고마워요" 대답하고 헤드폰을 받아 드니 부끄러운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아이를 뒤로 하고 전시실에 입장하였다.



6. 어릴 적의 나는 태양을 꼭 노랑으로 칠하곤 했다. 빨간색 크레용으로 해를 그리던 아이들이 너의 해는 왜 오줌색이냐며 시비를 걸었지만 전혀 굴하지 않았다. 아침의 해나 저녁의 노을은 물론 붉은빛이었으나, 눈을 들어 바라본 정오의 태양은 노랗게, 때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본 그대로, 나의 해는 노랑이었다. 노란색에 집착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에는 마치 내가 그와 같은 천재의 반열에 함께 있는 양 우쭐댔었다. 오래 달리기를 실컷 연습하고서 지원한 공군의 선발 시험에서, 땡땡이 속에 파묻힌 숫자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단 한 걸음도 뛰어보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에야 내가 녹색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 고흐가 특정한 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종교적인 열심이 넘쳤던 것은, 전두엽의 특정 부위에 이상을 가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반응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BBC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던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전시관에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그림들이 가득했.

7.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한 학기 내내 수채화 그리기에 매진했던 고등학교 2학년의 미술 시간을 기억해 냈다. '마녀'라는 별명을 가졌던 미술 선생님은 나무 하나를 그릴 때도 다양한 종류의 녹색을 만들어 사용할 것을 주문하곤 했었다. 물의 농도를 조절하고 녹색과 노랑, 녹색과 청색, 혹은 붉은색을 혼합하여 적어도 세 종류 이상의 색을 통해 나무 한 그루의 잎사귀를 채색해 나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빛의 변화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것저것을 적당히 섞어 만든 다양한 색을 손 가는 대로 대충 찍어 발랐는데,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시에서 주관한 사생대회에 나가 받은 상장이 있는 것을 보면 비단 미술 선생님의 평가는 아니었다. 나, 녹색약이었는데.

8. 미술전시를 나오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닐 듯싶어(어차피 무료니까) 오른쪽의 전시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 걸어 꽤 지친 관계로 그 넓은 박물관을 다 둘러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바로 3층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이 생긴 이래 서너 번은 족히 왔었던 기억인데, 올 때마다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1층부터 전시실의 순서를 지켜 돌곤 했었다. 당연히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 체력은 바닥을 치고, (좀 넓어야지) 2층과 3층은 고런 것이 있나 보다 정도,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올라가 보지도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사 수업을 담당하고 있고, 그렇다면 3층의 아시아관 정도는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일본,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와 동남아시아 순서로 전시가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거꾸로 돌게 되었다. 비슈누와 시바, 보살과 부처, 불상, 미륵보살, 불상, 불상, 큰 불상, 작은 불상, 머리만 있는 불상, 머리 없는 불상, 간다라 불상... 어쨌든 각종 신들이 가득했다. 조도가 낮은 전시실은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한 여자가 유리에 이마를 마주 대하고 왼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지나가며 어깨너머로 손에 든 것을 확인하니, 종이 위에 옮겨지는 불상의 머리가 보였다. 불편한 자세로 그린 그림에 꽤나 완성도가 있었다. 나와, 그림을 그리는 여자와, 무전기를 든 직원 몇이 하릴없이 고요한 전시실을 거닐 뿐이었다.

9. 내용이 길어지며 퍽 지쳐버렸다. 그래도 잊기 전에 기억들을 옮겨야 한다. 사진도 한 장 안 찍었잖은가.

10. 종로를 좋아한다. 한적한 대로가 좋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좋다. 대학 시절 한창 쏘다녔었다. 두 번째 행선지는 광화문 근처의 시네큐브였다. 퍽 오랜만이었다.
   이동하며 휴대폰으로 예매를 했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멜라니 로랑 주연작을 보려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호아킨 피닉스의 것으로 확정했다. <글래디에이터>의 밉살맞은 검투사 황제 콤모두스 역을 맡았던 배우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화려한 출연진이었다.



  이동하는 길에 한문학에 역사학에 경영학에 교육학까지 전공을 하고 이번 학기를 끝으로 오랜 대학 생활을 마치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방금 끝이 난 면접의 마지막에 들은 말은 "차라리 동아시아 학술원을 가지 왜 교직원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단다. 청년들을 압박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는지 궁금했지만 면접을 본 것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대답을 들을 일은 없었다. 책을 꺼내려다가 지하철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학을 다닐 때 매일같이 몸을 실었던 지하철이었는데. 책을 읽고 소설을 구상하고 과제에 심지어 논문까지 완성한 지하철이었는데.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참 변한 것이 없었다.


  시청역에서 내렸다. 총파업과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겨울 이후 처음이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고 붉고 푸른 깃발을 흩날리던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출구를 나와 세종로를 따라 걸었다. 근처에 보이는 투썸플레이스도 엔제리너스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므로 영화관과 같은 건물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스모크햄 샌드위치를 하나 시켰다. 큼지막하여 마치 배추와 같았던 양상추만 접시 위에 가득 남았다. 책을 꺼내 들고 읽었다. 한 손에 들 수 있는 크기의 책이 마음에 들었다. Jeff Buckley가 "절망한 왕이 부르는 할렐루야"를 노래했다. 사랑하기에 살 수 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수금으로 할렐루야를 작곡했던 절망한 왕도 사랑을 했다.

11. 영화관에는 혼자 온 사람이 많았다. 개봉 예정작 중 마음에 드는 것이 많았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또 난해했다. 좋은 대사가 많았는데, 많았으므로 마땅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된다면 따로 늘어놓아야 할 것 같다.

12. 놀랍게도 배터리는 집 앞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방전되어 자동으로 종료되었다. Demian Rice가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너를 향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어" 하고 절정을 노래하던 순간이었다. 종로에는, 지하철에는, 안양역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인생들이었다. 엉켜있는 삶의 매듭들이 낯설었다. 그것이 집 밖의 세상에서 목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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