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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un 26. 2020

<칸의 제국> 서평

중국사에 대한 문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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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국문과에서 주관하는 문학이론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구조주의니 해체주의니 하는 용어들과 씨름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수업 중에 문학의 효용성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여러 가지 답변 가운데 하나로, 전공을 한껏 살려 문학작품은 역사적 사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모든 것이 그렇듯 문학 역시 역사의 산물이고, 따라서 당대인의 사고와 관념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되돌아온 반응은, 조금의 덜함도 더함도 없이 전달하자면, ‘천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천박한 이해죠,라고 교수자는 말했었다.

  또 한 번은 역사 교육과 관련된 강의를 들었다. 역시 역사의식, 역사적 통찰력, 역사적 사고력, 역사적 상상력과 같은 추상적이다 못해 야릇하기까지 한 용어들과 씨름해야 했다. 단순 암기, 암기의 강요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소양을 길러 주는 것이 역사 교육의 목적이 되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역사적 상상력에 대한 설명은 문학적 상상력과의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역사적 상상력은 반드시 사료와 같은 증거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학적 상상력과는 다른 점이다. 역사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문학적 상상력은 ‘왜곡과 날조’다. 이 또한 표현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이다. 왜곡과 날조라고, 교수자는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왜곡과 날조’의 결과물들을 모아, ‘천박하게도’ 역사적으로 이용한 책이 한 권 있다. 예일대 교수 조너선 D. 스펜스(Jonathan D. Spence)의 『칸의 제국(The Chan's Great Continent)』이 그것이다.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China in western minds)>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게도 그 천박한 왜곡의 묘미에 이끌린 까닭이었다. 다시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문학과 역사의 결합>이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대체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 과연 그러한 결합이 가능은 한 것인지 확인해 보아야 했다. 책을 읽게 된 동기에 대한 설명은, 이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열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첫 번째 장 <마르코 폴로의 세계>를 읽고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첫 번째 장에서 원(元) 제국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당장 두 번째 장부터 명(明) 대의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는 점 때문이었다. 열두 개의 장이 각각 독특한 제목을 달고 서로 다른 소주제 아래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책은 사실상 연대기적인 구성으로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결코 원대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서술이 나올 리 없다는 뜻이었다. 범위와 방향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는데, 역사에서의 시간 지속에 대해 논의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견해가 도움이 되었다. 브로델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학을 비판하며, 과거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생활을 이루기도 하는 시간의 문제가 역사학에서 간과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종래의 역사학이 짧은 시간, 즉 개인과 사건에 초점을 두었다면, 새로운 사회경제사에서는 전통적인 서사적 역사 이외에 10년, 20년, 또는 50년의 큰 묶음으로 과거를 문제 삼는 국면(conjoncture)이 발견되며, 그보다 더 장기적인 규모의 역사 또한 존재한다고 브로델은 생각했다. 그는 장기 지속의 역사를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보았으며 구조(Structure)라는 용어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다, 브로델은 인간의 삶을 틀 지우는 구조의 구체적인 예로 지리적 조건, 생물학적 사실, 생산성의 한계 등을 들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제약도 포함되는데, 브로델은 심성의 틀을 “장기간 지속되는 감옥”으로 비유하며 깨트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장기 지속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중국인들의 삶의 전반에 대한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풍속, 의식주 생활 등은 하루아침에 변모하는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남녀가 떼 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이,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의 『위서(魏書)』「고구려전(高句麗傳)」, 당(唐)의 요사렴(姚思廉)이 편찬한 『양서(梁書)』의 「제이전(諸夷傳)」에나, 역시 당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남사(南史)』의 「고구려전」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거나,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편다”는 것과 같은 설명 또한 진수의 『삼국지』부터 당 시기에 편찬된 사서들에까지 고루 나타나 있으며, 의복과 혼인에 대한 기록 역시 사서 편찬 시기의 늦고 빠름에 상관없이 대동소이함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인간 삶의 생활을 일정하게 제약하고 틀 지우는 의식주 생활과 같은 조건들은 장기 지속의 역사에 해당하며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는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서양인 관찰자들에 의해 진술된 원대 이후 중국인들의 모습은―물론 방증과 같은 구체적인 확인 작업이 뒤따라야겠지만―그 이전의 중국의 모습에까지 소급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장기 지속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은 서양인 관찰자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브로델의 말을 빌리자면 “생활 및 사고, 믿음의 방식을 규제하고, 가장 자유로운 정신들의 지적 모험에도 처음부터 어떤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서의 장기 지속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아래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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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래로, 중국에 실제로 가 본 서양인들과, 혹은 이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서양인들의 체험기, 보고서, 논문, 시, 소설, 희곡, 편지, 회고록 등이 본서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인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중국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과는 다른 풍습에 대해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의 서구 사회에서는 중국의 문화와 그 양식이 유행했다. 중국의 오래된 역사와 독특한 전통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관찰자의 역할을 담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19세기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은 커다란 편견과 차별에 몸부림쳐야 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성립된 사건은 사회주의자나 비사회주의자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황제에 버금가는 존재로 비쳤다. 중국에 한 번 가 본 적 없는 천재들 역시 중국을 소재로 문학작품을 기록하는 등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요약은 <저자 서문>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구태여 자세하게 덧붙이지 않는다.



4


  조너선 스펜스는 자신의 서술 방식을 ‘sighting’이라는 용어를 써서 에둘러 표현한다. ‘일람’이라는 번역이 그 의미를 포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자 역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밝혀 놓은 대로 sighting은 그 의미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또 시기에 따라 다르게 쓰였다. 항해와 탐험 과정에서의 간헐적이고도 불확실한 ‘관측’, 사격의 조준 행위, 도박 용어에서의 속임수, 한숨짓기 등이 그것이다. 책의 서문에서 sighting의 다양한 용례를 설명해 놓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직간접적으로 중국을 체험한 서양인들의 ‘일람’ 역시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저자는 책의 대부분을 그들의 기록에 대한 직접 인용, 또는 간접 인용으로 채워 놓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은이 주>를 보면 그 노력과 정성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원문 인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까닭에, 저자의 문체를 따라 물 흐르듯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것이 원문의 글인지 글쓴이의 논평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 십상이다. 저자는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로, 48인에 달하는, 중국에 대해 논평한 서양인 관찰자의 기록 속에 자신의 생각을 교묘히 숨겨 놓는다. 그들의 의견에 대해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들의 생각이 실제 경험의 사실성이나 정확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책의 열두 번째 장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천재들>에서다. (앞서 제시된 인용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히나 이 장에서 제시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와, 루이스 보르헤스(Luis Borges),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은 배경과 분위기, 소재를 중국에서 따왔을 뿐 중국과는 전혀 무관한 작품들이다. 맨 첫 장 <마르코 폴로의 세계>에 등장하였던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는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인간의 인식에 대한 의심과 부정으로 재현된다. “모두 쓸데없는 짓이야.” 서양인들이 본 중국의 모습은 이율배반적이다. 어떤 이에게 중국은 “멋진 신세계”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그 수도에 들어가는 것이 “포르투갈에서도 가장 가난한 산촌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대단히 낙후된 나라일 뿐이다. 중국인은 “정직하고, 거래할 때 신의와 도의를 엄격하게” 지키는 이들이면서도 “교활한 농간을 부리고 거짓말을 일삼고 온갖 이익에 집착하는 면에서 다른 어떤 민족도 중국인을 따라가기 어렵다.” 중국인들처럼 “강력한 민족과 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할 유럽 군주는 하나도” 없으면서도 동시에 “강대한 나라의 공격만이 아니라 약소한 오랑캐의 침략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운명”에 놓인 이들이 바로 중국인이다.


  칸트는 개별 대상들에 관한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제공하는 감성이 인간 스스로 부여하는 공간과 시간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서만 현상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의 경험은 인간에게 내재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중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부딪힌 서양인들의 경험 또한 이와 같다. 그들이 확인하고 기록된 특징들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에게서 우러나온 것이지 대상 자체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설명한 중국은 결코 중국과 같지 않으며 같을 수 없다. 구체성과 객관성을 확립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이 가해진다 한들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가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밖에는 머리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귀랍니다.” 하고, 마르코 폴로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중국에 다녀왔는가 하는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설령 폴로의 기록이 중국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단지 당위와 바람으로서의 “베네치아의 정반대 모습”을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의문은 『동방견문록』이 어떻게 씌어졌느냐가 아니라 ‘왜’ 씌어졌느냐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그 본질적인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마르코 폴로의 책이 서양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은 정복욕에 불타는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일깨우고 환상을 심어 주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폴로의 책을 읽으며 여백에 수많은 메모를 남겼다. 여백을 가득 메운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흥분과 환상이었다. 이는 서구 문명을 꽃피운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지독한 불운과 불행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성격의 것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 인디오들은 서구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정복자들에 의한 학살과 비인간적인 노예 노동을 감내해야 되었고, 여기에 여타 우생학적 요인까지 더해져 인구수가 급감하는 비극의 결과를 맞이해야만 했다. 유사한 종류의 비극이 식민주의의 물결을 타고 대부분의 비유럽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호기심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중국에 주목해 왔는가? 본서는 무수한 자료를 제시하며 내내 그 이야기를 다루었음에도 그 말미에서 저자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사실상 중국에 대한 책이 아니다. 중국을 다룬 그들에 대한 이야기, 사고와 믿음의 방식을 규제하고 어떠한 지적 모험에도 처음부터 어떤 제약을 가하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은 역사를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대단히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시각이다. 사실에 기초한 역사학에 대한 반론이다. 이는 어쩌면 사실을, 사실의 재현을 부르짖는 역사학에 대한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 쿠빌라이 칸의 상상과, 마르코 폴로가 꾸며낸 이야기들의 집합은, 결국은 모든 기록이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의 증언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상상과 관념의 산물로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종류의 역사 서술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곡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가 없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불확실한 하나의 학설일 뿐이다. 중국을 둘러싼 수많은 기록을 제시하였음에도, 그 안에서 중국을 찾아낼 수 없었을뿐더러 애당초 중국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칸의 제국』의 결론이었다.




참고문헌

조너선 D. 스펜스, 『칸의 제국』 김석희 역, 서울:이산출판사, 2000,
페르낭 브로델, 이정옥 역,「역사학과 사회과학들 : 장기지속」『역사학 논고』, 서울:民音社, 1990,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서울:이룸, 2008,
『三國志』「東夷傳」
『魏書』「高句麗傳」
『梁書』「諸夷傳」
『南史』「高句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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